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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light Nov 19. 2020

형편없던 개발자 데니스 크롤리, 구글에 앱을 판 스토리

데니스 크롤리는 닷지볼을 세워 구글에 팔았고 이후 위치 기반 SNS인 포스퀘어를 창업한 인물이다.  하지만 프로그래머 치고는 실력이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테크 저널리스트 클라이브 톰슨의 책 <은밀한설계자들>을 보면 데니스 크롤리는 스스로를 최악의 프로그래머로 부를 정도로, 프로그래밍 실력이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서비스를 직접 개발했고 그걸 프로그래밍 천재들이 넘쳐나는 구글에 팔았다.

 1990년대 중반 크롤리는 첨단 기술과 문화에 심취한 20세 청년이었다. 그는 동네 술집에가서 음악을 들으며 술마시기를 좋아했고 그러면서도 첨단 기술 분야에서 일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프로그래밍을 배우려고 무척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빈번히 실패했다. 
 그는 내게 "정말로 컴퓨터 과학을 배우고 싶었어요. 그러나 초급 수준의 강의마저도 잘 해내지 못했죠. 제대로 컴파일된  프로그램을 작성해 본적이 없었어요"라고 말했다.변수할당, 함수 호출,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했다. 당시에 그가 할수 있는 일을 기껏해야 간단한 웹페이지를 어찌어찌 만드는 것이었다.

컴퓨터를 좋아했지만 크롤리는 사회 첫발을 프로그래머로 시작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주피터 커뮤니케이션즈에 컨설턴트로 취직했다 기술 관련 업체들을 평가하고 시장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 성과가 좋지 않았지만 프로그래밍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던 모양이다.

그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글이나 쓰고 앉아 있는 일보다 무언가 직접 만들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저녁이 되면 친구들과 함께 시내 여러 술집이나 클럽을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크롤리와 친구들은 자신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밤새 문자로 주고받았다. 당시는 문자 메시지 서비스가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고 그나마 같은 통신사 가입자끼리만 문자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장소에서 놀고 있는 친구들끼리 서로 연락하며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크롤리는 가까운 친구들끼리 혹은 더 나아가 친구들의 친구들과도 통신사와 상관없이 연락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1999년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다시 프로그램을 시작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사무실 동료 책상에서 액티브 서버 페이지에 관한 두꺼운 매유얼을 빌려 공부를 시작했다. 2년간 시행착오를 거치며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도시 안내, 친구 찾기 서비스 초기 버전, 친구끼리의 신호 교환을 지원하는 빈약한 서버 프로그램 등 몇몇 코드를 만들어 실행시킬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프로그래밍 결과물의 수준은 높지 않았다.
"제가 만든 프로그램은 전혀 훌륭하지 않았고 간신히 돌아가는 듯 보였어요" 분명 보잘 것 없는 프로그램이었지만 그와 그의 친구들은 어느 정도 수준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한지 어렴풋이 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크롤리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여전히 프로그래밍 실력이 형편없었다. 빈디고의 프로그래머들은 크롤리가 기본적인 문자 알림 앱을 만들려 한다고 생각했고 나름 재미 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든 크롤리가 진짜 C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도록 훈련하려 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아무 소득이 없자 크롤리가 다른 건 몰라도 프로그래머만은 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를 해고했다. 당시는 많은 인터넷 기업이 닷컴 버블 붕괴 속에 사라지던 때였다. 회사에서 해고된 덕분에 여유 시간이 생겼고 크롤리는 자신의 위치 기반 문자 알림 서비스 초기 프로그램을 계속 가다듬으며 향상시켰다. 그는 MIT미디어랩에 들어가 석사학위를 받으려 했으나 평균 이하의 프로그래밍 실력 때문에 입학하지 못했다.

그래서 들어간 게 예술 전공 대학원으로 잘 알려진 뉴욕대학교 ITP다.

  그는 2002년 ITP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알렉스 레이 암나사라는 친구를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팀을 이루어 크롤리가 만들다 그만둔 문자 알림 앱을 다시 손보기로 했다. 먼저 PHP라는 최신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해 다시 프로그래밍을 했으며 제작한 프로그램을 다른 ITP 학생들과 공유했다. 크롤리가 솔직하게 인정했듯이 두 사람이 작성한 프로그램은 반복적인 명령어 덩어리였다.
 
그러나 그러면 어떤가? 프로그램은 매우 안정적으로 작동했고 두 사람은 계속 열심히 작업했다. 마침내 그들은 제작한 앱을 닷지볼이라는 이름으로 2004년 세상에 공개했다. 크롤리는 수년간 자신의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개발한 끝에 체크인이라는 근본적인 개념을 만들었다. 닷지볼은 점점 유명해졌고 급기야 2004년 가을에는 구글에서도 관심을 가질 만큼 유명해졌다. 구글은 크롤리와 레이너트를 뉴욕 타임스웨어 사무실로 초대했다.

프로그래밍 고수들이 형편없는 코드에 기반한 닷지볼을 어떻게 봤을까? 코웃음을 쳤을까? 아니었다. 구글은 결국 닷지볼이라는 앱의 가치를 인정했다.


구글 임원들은 닷지볼 소스코드 수준을 파악하기에 앞서 기술 면접을 통해 두 사람의 기술 수준을 파악하고자 했다. 세계 최고의 프로그래머들이 세계 최악의 프로그래머들에게 질문했던 이날의 만남은 거의 코미디였다. 당시 면접에 참여했던 구글 프로그래머 중 한명은 터키 태생인 오컷 바여콕텐이었다. 크롤리의 기억에 따르면 구글 프로그래머들은 구글 면접에서 자주 묻곤 하는 몇가지 단골 문제를 질문했다. 스탠퍼드 대학교 혹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컴퓨터 과학을 전공한 학생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을만한 그런 문제들이었다. "전혀 모르겠어요." 크롤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질문조차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저는 프로그래밍 과목을 수강한 적이 없어요." 많은 비판이 있었지마 결론적으로 구글 프로그래머들은 두 사람이 만든 앱의 가치를 크게 인정했다 


저자가 크롤리의 사례를 이유로 든 것은 천재형 프로그래머,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10X 프로그래머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10X 프로그래머가 개발에서 역할이 큰 것은 맞지만 프로그래밍 실력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글 프로그래머들은 분명 크롤리 보다 훨씬 프로그래밍을 잘할 수 있었고 그런 프로그래머가 구글에는 많았다. 그러나 크롤리에게는 그들 못지 않은 아니 그들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바로 닷지볼과 같은 과감하고 미친 듯 보이기도 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낼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게에는 세상을 남들과 다르게 보는 능력이 있었다. 덕분에 술집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화려한 도시의 미로를 누비고 다니는 친구들이 자신들의 위치와 정보를 공유하며 전해오는 즐거움에 주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1X 프로그래머, 아니 형편없는 프로그래머라 부를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일상을 기록하는 개념인 체크인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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