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스타트업 혁신을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는 바로 파괴다. 혁신도 그냥 혁신이 아니라 파괴적 혁신이어야 뭔가 있어 보이는 것처럼 대접받는 분위기다. 의미 자체만 놓고 보면 무시무시한 뉘앙스를 담고 있는 단어인 파괴가 혁신과 결합돼, 엄청난 변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통하고 있다.
그런데 잭 도시와 함께 모바일 결제 회사인 스퀘어를 창업한 짐 매캘비는 파괴, 파괴적 혁신이라는 말에 대해 좀 비판적이다. 파괴적 혁신이 혁신의 대세가 된 것은 대해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이다.
그가 쓴 책 '언카피어블'을 보면 파괴는 혁신이 아니라는 생각도 엿볼 수 있다. 파괴라는 단어는 이제 파괴되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모방은 인간의 성향이기에 실리콘밸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조직에도 침투한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대신 모방이 아니라 파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나의 시스템을 파괴하기까지 하는 것을 어떻게 모방이라할 수 있을까? 이것은 초점의 문제다.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이 목표라면 적어도 무엇을 파괴하는지 알아야 한다.
영업을 시작한 첫 주에 우리는 결제 산업 전문가를 고용해 조언을 받았는데, 곧바로 계약을 끝내 버렸다. 우리는 업계를 모방할 생각이 없었는데 전문가의 조언은 전부 기존의 결제 산업에서 나온 것이었다. 원하지 않는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돈을 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창업 후 몇 년 동안이나 결제 산업 종사자 채용을 피한 덕분에 우리가 새로 만들고자 하는 일에 일반적인 상식을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다.
이제 파괴는 기업가 정신 만큼이나 진부한 단어가 되어서 이 두 단어는 재활센터의 룸메이트라 해도 될 정도다. 1997년에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에 의해 보편화된 파괴적 혁신이라는 개념은 당시에만 해도 매우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었다. 크리스텐슨이 말한 파괴적 혁신은 이제 줄여 그냥 파괴라고 불린다. 이런 지나친 단순화는 너무 극단적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파괴는 비즈니스 계의 고과당 옥수수 시럽 같은 존재가 되었다. 순응의 익숙한 맛을 숨기려고 투자 설명회에 빠지지 않고 기조연설에 남용되는 재료가 된 것이다. 오늘날 실리콘밸리에서는 해마다 사람들이 그냥 파괴라고 부르는 컨퍼런스까지 열린다. 나는 매달 기존 산업의 경제학을 파괴하겠다는 스타트업들의 투자 설명회도 듣는다. 그들의 설명에는 경제의 보이지 않은 자본을 재배치하는 대학살 이후에는 좀 더 나은 세상이 찾아오리라는 함축적 의미가 숨겨져 있다. 하지만 파괴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크레이그리스트는 신문사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안내 광고를 파괴했고 그러자 신문사들은 기사 취재를 줄이고 기자들을 해고하는 것으로 반응했다. 그때 기자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건들이 밝혀지지 않았을까?알수 없는 일이다. 파괴는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파괴의 더 위험한 측면은 초점을 역행시킨다는 것이다. 최저가가 고객이 아닌 경쟁자에 집중한다는 의미인 것처럼 파괴는 해체 또는 파괴되어야 하는 오랜 시스템에 초점을 맞춘다. 기존 시스템 중에는 파괴되어야 마땅한 것도 있으나 기존의 것을 파괴하려다 보면 기업가 정신의 초점인 창의적인 혁신에서 멀어진다. 그런 방법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역사 속의 훌륭한 기업가들을 연구하면서 나는 예상치 못한 파괴와 말살이 엄청나게 많이 발견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긍정적인 것들이 훨씬 많았다. 기업가적 기업의 대다수는 기존의 기업들이 가진 고객을 훔쳐 오지 않고 아예 새로운 사람들을 시장에 끌어들였다. 낙관주의, 혁신, 수용이 바로 시장을 확장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단어다. 파괴라는 단어는 이제 파괴되어야 한다.
그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스퀘어는 파괴와는 거리가 있는 혁신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잭과 나는 신용카드 결제 시스템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 새로운 고객층을 추가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출발했다.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 스퀘어를 사용하는 소상공인들은 미국 전역 신용카드 가맹점의 상당 부분을 대표한다. 물론 레모네이드 판매대와 내 친구 밥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스퀘어는 기존의 기업들이나 그들이 이용하는 신용카드 결제 서비스 업체들을 파괴시키지 않았다. 10년간에 걸쳐 스퀘어와 우리 고객들은 피라미드의 가장 아랫 부분을 창조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스퀘어가 파괴적인 기업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파괴했다는 걸까? 우리가 시장에 진출했던 2009년 당시 하트랜드 페이먼트 시스템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데이터 유출 사건 때문에 간신이 살아 남은 채로 파산 직전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하트랜드는 여전히 영업 중이다. 스퀘어가 처음 나왔을 때 영업하고 있던 주요 신용카드 결제 기업들 전부 마찬가지다.
스퀘어는 소상공인들이 스마트폰으로 신용카드 결제를 저렴하게 할 수 있는 솔루션으로 창업했다. 하지만 지금은 핀테크 전반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상황이다. 은행도 하려는 모양새다. 하지만 타깃 고객은 여전히 소상공인들에게 좀더 많은 기회를 주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 보인다.
기존 시장의 테두리안에서 보면 벽은 견고하고 시장은 유한한것 같다. 나중에 뒤돌아 보면 터무니 없는 생각이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나 혁신과 기업가 정신이 합쳐지면 성벽은 광활한 지평선으로 변한다. 사우스웨스트가 세상에 나왔을 당시에는 돈 많은 사람만 비행기를 타고 싶어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당시에 비행기 탑승은 돈이 많아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보통 사람들은 지상에만 있고 싶어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파괴하는 사람들이 생각해야만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사우스 웨스트가 새로운 고객들을 항공 산업에 유입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이 다른 항공사들을 파괴했는가? 사우스웨스트의 창업 이래 미국에서는 약 200개의 항공사가 파산했다. 그것이 과연 사우스웨스트가 일으킨 파멸이었을까? 흥미롭게도 정반대였다. 사우스웨스트의 성공은 다른 항공사들을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