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간 포브스,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 등에서 경제 저널리스트를 지낸 폴 블루스타인이 쓴 킹달러는 때가 되면 한번씩 나오는 달러 위기론 속에서도 달러 지위가 흔들리지 않은 배경을 다룬다. 앞으로도 때가 되면 한번씩 달러 위기론이 나오겠지만 달러 지위는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는게 저자 생각이다.
1970년데 금과 태환이 무너지고 2000년대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에서 금융 위기가 터졌을 당시 달러 패권이 약화될 것이란 관측이 많았지만 결과만 놓고 예상과는 거꾸로 상황이다.
과실, 의무 불이행, 의도적인 불법 행위 등이 대부분 미국 내에서 비롯된 문제였는데도, 다시 말해 위기가 미국산이었는데도 세계 각국의 자금이 달러로 몰려들었다는 사실이다. 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2008년 4월부터 2009년 3월 사이의 달러 환율은 다른 통화들 대비 15% 넘게 상승했다. 이같은 현상을 직관에 반한다, 역설적이다, 불공평하다, 혼란스럽다, 왜곡되었다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으나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의 통화인 달러가 안전한 피난처로 인정받은 것 만큼은 사실이다.
달러가 미국발 위기에서 무사히 살아 남고 오히려 주도적인 위상을 유지했다는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이를 위해서는 해외 은행들의 다급한 달러 수요라는 또 하나의 위기 현상과 이에 대한 연준의 구제 조치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벤 버냉키 의장 휘하 연준은 사상 최초로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을 위해서도 최종 대부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조치들이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연준한 가능한한 오랫동안 세부 사항들을 기밀로 유지하려했고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법원의 결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공개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럽에 기반을 둔 은행들의 대차대조표에는 달러로 표시된 부채가 잔뜩 쌓여 있었다. 미국의 주택담보대출에 투자하면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마구 돈을 빌렸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달러가 갖는 유동성도 강조한다. 현재 시점에서 달러가 갖는 유동성에 맞설자산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동성은 언제든 사고 팔수 있는 것은 물론 사고 팔았을 때 시장 에 미치는 변동성이 크지 않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세계 금융 위기 때 달러가 매력적으로 여겨졌던 가장 큰 이유는 사우디 아라비아통화청이 달러 표시 자산을 선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비슷했다. 그것은 바로 미국 금융 시장의 유동성이었다. 197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가 대량으로 매입하더라도 가격에 영향을 주지 않아 언제든 손쉽게 팔 수 있는 투자 상품은 사실상 미국 국채 뿐이라고 판단했듯이 2007년부터 2009년 사이의 투자자들도 미국 국채를 가장 유동성이 뛰어난 자산으로 보고 갈망했다.
금융위기는 본질적으로 시장 참여자들이 일상적인 활동에 필요한 거래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어 유동성이 증발하고 시장이 마비되는 상황을 뜻한다. 예를 들어 은행이 만기가 임박한 채무를 상환하기 위해 다른 은행에서 단기 자금을 빌리지 못하게 되는 등의 상황이다. 세계 금융 위기 당시 시장이 마비된 까닭은 떳떳하지 못한 주택 담보 대출 관행이 폭로되면서 은행들 사이에 불신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상대 은행이 현금 부족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가 생겨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순식간에 두려움이 퍼져 나가면서 모든 시장 참여자가 넉넉한 현금을 확보하려 기를 쓸 것이고, 그 결과 유동 자산의 가치가 급등할 것이다. 세계 금융 위기가 시작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쉽고 빠르게 또 죄소한의 비용으로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을 쌓아두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동성이 낮은 자산을 헐값에 내다 팔게 되거나 한술 더 떠서 유동성 부족으로 채무를 변제하지 못해 막대한 손실을 떠안게 될 위험을 누가 감수하려 하겠는가. 자연스레 미국 국채에 대한 수요가 대폭 증가했다.
청산은행간결제시스템(CHIPS)도 저자가 달러 지위를 떠받치는 인프라고 강조하는 포인트다.
최신 공시 자료에 따르면 CHIPS는 하루 평균 54만건이 넘은 거래를 처리하며 그 총액은 1조8000억달러에 이른다. CHIPS의 전산망은 살크해트를 쓴 채 타원형 테이블 주위를 돌던 은행원들의 역할을 대시한다. 알고리즘을 이용해 은행을 포함한 금융 회사들 간의 주문을 자동으로 매칭해 주는 것이다. CHIPS의 자체 시스템은 "세계 금융위기, 9.11테러, 코로나19 팬데믹, 자연 재해를 겪으면서도 언제나 사고 한번 없이 결제를 정산하고 마감 시의 잔액을 분배해왔다.
CHIPS가 하는 일이 과연 그토록 중요할까? 사실 청산과 결제를 담당하는 CHIPS는 금융 시스템의 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아 아니다. 기계적일 뿐 아니라 금화 꾸러미를 지닌채 뉴욕 거리를 뛰어 다니던 포터들의 모습을 CHIPS 탓에 더는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지루하기까지 하다. 어느 나라나 청산소를 설립할 수 있으며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청산소를 운영하고 있다. 게다가 CHIPS에서 청산되고 결제되는 거래 건수와 금액은 페드와이어 만큼 크지도 않다.
CHIPS는 달러로 이루어지는 국제 거래의 주요 경로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세계적으로 그 같은 거래의 90% 이상을 처리하며, CHIPS를 통해 처리되는 결제 가운데 95% 정도가 미국 밖에서 시작되거나 종료된다. 여전히 CHIPS가 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배관을 통해 흐르는 것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동하는 거액의 달러인데다가 그 배관이 미국 법의 관할 권에 속하니 각국의 은행은 물론이고 정부까지도 배관에 대한 접근권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일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미국 정부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