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헐적 세계여행자의 뒤늦게 쓰는 15년 여행일지

by 포레스트

기록에 집착하며 여행을 하는 건 여행을 망치는 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었다. 어쩌면 귀찮음에 대한 정당화일 수도 있고 어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뒤늦게,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한 지 무려 15년이나 지나서야 이렇게 글쓰기를 시작하는 건 점점 흐릿해져 가는 기억에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게 되었다는 걸 반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유별나게 어려서부터 여행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내가 그간 그리 평범하지만은 않은 여행을 다니면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더 시간이 지나 기억이 없어져버리기 전에 '뒤늦게 쓰는 여행일지'라는 글로 남겨보려고 한다. 여행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 이건 여행 일지이자 2024년 버전의 내 인생 회고록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첫 번째로 기록할 여행은 스스로 첫 여권을 만들었던 2012년 그때의 미국 여행이다.


이 여행 얘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2012년 1월, 만 스물 하나를 맞이한 나의 인생에 대해 짤막하게 요약하고 넘어가려 한다.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마침내 서울에 있는 모 대학 영어영문학과에 09학번으로 입학하게 된다. 편도로 한 시간 반, 부지런하게 한다면 충분히 통학 가능한 거리이지만, 부모님께 자취방을 구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정문 30초 거리에 있는 흑석동 하숙집에서 생애 첫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숙집은 각 한 층에 다섯 개의 방에 화장실이 하나 딸린 낡은 주택이었다. 1층은 여자, 3층은 남자, 2층은 주인집과 주방, 그리고 식당이 있었다. 월세 40만 원에 매일 아침밥과 저녁밥이 제공되었고(안타깝게도 거의 먹지 못했지만), 1층에 위치한 내 방은 겨우 사람 하나 누울 공간과 작은 책상, 그리고 행거 하나로도 가득 찼다. 이불을 깔고 바닥에 누우면 벽에서 웃풍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가족들의 품을 떠나 처음으로 혼자 산다는 생각에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대학 신입생 생활은 로망의 연속이었다. 새터를 가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말 그대로 매일 술을 마셨다. 제공되는 하숙집 밥은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매일 저녁은 술약속으로 가득 차있었고, 이런 생활을 지속하려면 매달 아빠가 보내주는 40만 원의 용돈은 턱도 없이 부족했다. 약 4000원의 시급을 받으면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날 번 돈은 그날의 술값으로 모두 쓰는 일상이 반복됐지만,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천국 같다고 표현하곤 할 정도로 세상 걱정거리가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즐겁기만 했다.


당연하게도 학업은 뒷전이었다. 3월이 지나면서 아침 수업을 절반 넘게 빼먹게 되자, 나는 그 수업을 드롭(수강취소)했다. 고작 15학점을 들으면서도 수업 시간에는 늘 친구들과 떠들거나 출튀를 하거나 책상에 엎드려 잤다. 학창 시절 내내 그럭저럭 공부를 잘했었고 대학도 성적에 맞춰 그다지 어렵지 않게 합격하면서 당시의 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러나 대학교 공부는 수능이나 학교 시험과는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의 경쟁 상대는 아마도 나와 학창 시절 성적이 비슷했을 동기들이었다. 벼락치기로 연명했던 고등학교 시절처럼 중간고사 일주일 전 처음 처음 도서관에서 펴본 사전만큼 두꺼운 전공책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가득 차있었다. 수업도 듣지 않았던 내가 게다가 영어로 된 이 방대한 범위의 책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고, 나는 그렇게 대학교 첫 시험에서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 들게 되었다. 인생 첫 쓰라린 패배감이 나를 감쌌다.


천성이 게으르고 노력하는 법을 몰랐던 나는 더 노력하는 쪽을 책하는 대신 그대로 학업을 포기해 버렸다. 뭐 어떻게든 졸업만 하면 되겠지.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고, 술을 마시고, 당시 술 잘 먹는 동기, 선후배로 과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세 학기가 똑같이 흘러가 2학년 1학기를 마쳤다. 슬슬 친구들이 복수전공이니, 교환학생이니 하는 것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문득 불안해졌다. 어린 시절부터 외국 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던 나는 교환학생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당연하게도 내 성적으로는 턱도 없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중, 유독 이런 나를 특이하다며 예뻐해 주셨던 교수님이 다큐멘터리 동아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아무 생각 없이 그 동아리에 갔다. 거기서 우리는 교수님이 시키는 대로 어느 캠프에 참가해서 촬영을 했고, 편집했고, 그렇게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영화를, 무대를 꿈꾸는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반짝이는 눈에 나는 홀린 듯 결심하게 되었다. 아, 나도 무대에 서고 싶어. 그 길로 부모님께 얘기했다. 나 연극영화과에 갈래.


여름방학 도중 학교에 방문해 휴학계를 내고 자취방을 정리하고 수원으로 돌아와, 바로 강남에 있는 연기 학원에 등록했다. 수원에서 강남까지 매일 왕복하며 몇 달 내내 연기를 배우고, 춤을 배우고, 아크로바틱을 배웠다. 학원에는 다양한 연령대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배우가 되겠다며 모여있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열정에 곧 전염되었고, 꽤나 열심히 그 학원에 다녔다. 그러던 중 당시 연극 연출가로 활동하던 연기 선생님이 연출 전공으로 입학해 연기를 해보면 어떻냐고 권유했다. 당시 서울에 있는 연극영화과의 경쟁률은 수백 대 일이었고, 연기 전공이 아닌 연출 전공으로 지원한다면 경쟁률은 50:1 정도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연기전공보다는 성적이 더 많이 들어가니, 다른 친구들보다 내가 훨씬 유리할 거라는 계산이었다. 나는 그렇게 연출 전공으로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수능을 접수하고 본격적인 원서 접수를 시작하며, 나는 아빠에게 당시 다니던 학교의 전과 시험을 포함해 연극영화과가 있으면서 동시에 아빠가 만족할만한 이름 있는 대학교 다섯 군데를 지목했다. 이 중에 한 곳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가 재능이 없다는 말이니까, 나 다시 영문과로 돌아갈게. 결과적으로 그중 한 곳에서 합격증을 받았고, 나는 다시 11학번 신입생이 되었다.


연극영화과 신입생 생활은 영문과 시절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곳은 철저한 기수제로, 바로 윗기수 선배보다 한 살이 많은 나는 자주 기싸움의 대상이 되었다. 아침 첫차를 타고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체력적으로 힘에 부쳐 또다시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학교 바로 앞이 아닌 청파동이었다. 새로운 대학 생활이 새롭고 즐거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이 전의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그리워하며 다시 친구들을 만나러 흑석동을 자주 찾아가곤 했다.


그 간의 친구들은 많은 것이 바뀌어있었다. 신입생인 나와는 달리 그들은 이제 대학교 3학년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들 셋 중 둘은 올해와 내년에 각각 미국 샌디에이고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 가장 나와 많이 어울려 놀았던 한 친구는 과 학생회장이 되었고, 같이 노느라 망쳐버린 1학년 시절의 학업 성적을 다시 회복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미국 샌디에이고로 첫 교환학생을 떠나는 친구를 보내주는 자리에서 그 친구와 나는 친구가 있는 샌디에이고로 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간 김에 비행기값 아까우니까 오래오래 있다가 오자. 그렇게 나의 첫 해외여행이자 장기 여행은 미국 캘리포니아로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