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에 재능이 있든 없든 현재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왜 운동을 하는가.' 물어보면 10명 중 9명이 대답한다. '살려고.' 아마 1명쯤은 즐기는 사람이 있겠지. 운동을 막 시작했거나 성과가 나고있는 매우 초기의 기간이라면. 그 후에는 그 역시 생존파로 오리라 생각한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특히 학창시절부터 본 사람이라면 MBTI 라는게 나오기 전부터 나는 그냥 ISFP의 정석이었다. 딴 건 모르겠고 그냥 누워있어야 되는 사람.
누가 나 사찰했나요?
특히 엄마의 독특한 가치관으로 인해 우리 가족은 매우 어릴때부터 눈 뜨기도 전에 밥부터 먹고, 다 먹었으면 들어가서 자는게 당연했다.역류성식도염 그런건 모르겠고 식구들 다같이 모여서 밥먹는 시간이 아침뿐이니 우선 모여서 먹고, 자는게 제일 중요하니 다 먹었으면 자라. 아주 단순하지만 600만 역류성식도염인들이 들으면 경악을 금치 못할 이야기. 그치만 더 놀라운건 이러한 조기교육 덕분에 난 역류성식도염 비스무리한 것도 겪은 적이 없었다. (임신출산 전까진..)
운동과는 매우, 아-주 매우 거리가 먼, 말그대로 먹고 자는 삶을 살다가 한번씩 동네 헬스장 회원권 끊고 하루이틀 깔짝거리다 결국 신발과 돈만 기부하는 동네 헬스장 기부천사였던 내가 진심으로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 시작은 역시나 런데이.
22년 3월 / 출산 약 두달만에 시작
런데이는 달리기 입문 어플로, 가장 대표적인 건 1분도 달리기 힘든 체력 초보자가 주 3회씩 어플 믿고 따라오면 8주 뒤엔 30분을 달릴 수 있는 체력을 가질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예전에도 몇번 깔짝깔짝 하다가 끝까지 해본 적은 없었는데 체력 밑바닥이 되고 나니 다시금 생각이 났다.
오랜만에 해보니 1분도 너무 힘들어서 하ㅋ 빡세네ㅋ 싶긴했지만 그래도 야심차게 런데이 1일차했다고 인스타그램에 자랑! 그러나 산후조리에 더 힘쓰라는 주위의 적극적인 만류로 어쩔 수 없이(?) 기분좋게(!) 포기했다.
23년 10월 / 다시 시작
런데이 1일차 포기 후 7월쯤부터 관절에 무리 없고 같이 하는 사람들도 잘 지내면서 수영을 열심히 했었다. 게다가 내가 의외의 재능도 있어서 선생님한테 칭찬도 받고 점점 앞으로 나오더니 나중엔 맨 앞에서 스타트를 끊기도 했었고, 남편과 수영장도 함께 가며 내 평생 운동이 재밌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었다.
그치만.. 접영 들어가면서부터 못하니까 재미없구.. 사설 수영장이라 매우 비싸고.. 복직하면서 수영장 옮겨 아침 7시에 하니까 너무 졸리구.. 고급반 들어갔더니 나는 선수 되고 싶지 않은데 선생님은 왜 자꾸 시계를 갖다놓고 몇초 안에 들어오라고 하시는지 순서 양보도 한두번이지 너무 빡세구..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새벽같이 줄 서서 겨우 등록한 수영장을 두달만에 그만 뒀다.
그렇게 운동을 쉬니 또 다시 오동통해지는 몸과 바닥을 모르고 하한가를 치는 체력..
살려고 운동을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남편과 같이 하는 아이 등하원 스케줄도 유동적이고 퇴근 후 겨우 2~3시간 보는 아이와의 시간을 뺏길 수 없어서 결국 아침에 잠깐 할 수 있는 운동. 다시 돌고 돌아 달리기였다.
평소보다 한시간 일찍 일어나 나가본 집 앞 공원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운동하는 어르신들이 정말 많았고, 집밖에 나가기라는 가장 어려운 난관만 넘어가면 상쾌한 공기가 온몸에 퍼지는 이 기분은 역시 운동으로밖에 느낄 수 없는 고유한 감각임을 오랜만에 깨달았고, 다 하고 들어왔는데도 시간이 남아서 계란 삶아먹고 당시 핫했던 이-팔 전쟁 유투브도 볼 여유가 있었다.
이왕 운동을 해야된다면 달리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뒤 30분 달리기를 위한 8주 미션을 다시 시작했다.
끝은 못내도 시작은 계속되는 나의 런데이
2. 생애 첫 마라톤에 도전하다. 작고 소중한 5km지만.
그치만 작심삼일도 길어서 작심일일인 인간에게 8주라니 너무나 가혹하다.
한 4주까지는 재밌었던 것 같다. 그래 6주! 그 이후부터는 꾸역 꾸역.. 3일에 한번은 무슨 1주에 한번..
달리기마저도 나를 운동인이 될 수는 없게 하는 건가, 싶을 쯤 부부끼리 하는 독서모임에서 5km 달리기를 해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마라톤이라니.. 내가..!?
머릿속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5km면 무시무시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런데이 하다보면 3~4km는 하는데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런데이는 걸을 수 있는데 마라톤은 계속 뛰어야 하니까 레벨이 다르다 싶다가,
남편 포함 다같이 하면 괜찮을거야 했다가, 그러다 내가 젤 밀려서 민폐되면 어쩌냐고! 까지.
그러다 에이 모르겠다 일단 지르자, 해서 다함께 등록하고 단체 아노락까지 맞췄다.
이제 피할 수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즐겨야했기에 다시 열심히 런데이를 하고 나이키런까지 깔아서 서로 달리는 기록까지 체크하며 선의의 경쟁심도 길렀다.
교대근무를 하는 남편 직업 상, 또 아기를 키우고 있는 우리 사정 상 같이 달리기는 어렵고 나는 남편이 아이와 자고 있는 아침에 달리고 오기를 결정했다. 잠이 무지 많아 학창시절 롤링페이퍼에 기면증 이야기까지 적힌 나지만 D-day가 생기고 폐 끼치면 안된다는 여러 동기부여가 생겨 이제 초보8주 프로그램이 아니라 나이키런과 워치를 통해 5km를 목표로 잡고 주에 3~4일 정도 달렸다.
그렇게 대회 당일. 주변에 마라톤 나간다 엄청나게 자랑했더니 막상 당일에는 덜 떨렸다.
아직 쌀쌀한 감은 있지만 날은 맑고 좋았던 24년 3월의 한강. 다함께 맞춘 아노락을 입고 한강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고, 준비운동도 하고, 드디어 출발!
가장 짧은 5km지만 참여하는 사람이 꽤 많았고 미취학아동부터 6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었다. 초반엔 다같이 우루루 움직이다보니 이거 달릴 수나 있겠나 싶었는데 조금씩 차이가 벌어지면서 원래 페이스대로 달릴 수 있었다. 주로 달리던 새벽의 평지 탄천코스가 아니라 약간의 언덕에 햇볕도 있고 사람들도 헤쳐 나가야 하다보니 꽤나 힘들긴 했으나 남편이 다섯발쯤 앞에서 페이스메이커를 해주며 콧바람 씩씩 거리는 못난이 사진도 계속 찍어주며 함께 달리니 즐거웠다. 남편은 나와 같이 달릴일이 있을때마다 나보다 몇발 앞서서 자기를 잡으면 멈추게 해준다는 지옥의 나잡아봐라(?)를 하는데, 이날도 거의 다 와가는 곳에서 또 그러길래 한번 잡아본다! 하고 몇백미터를 미친듯이 달렸더니 평소에는 볼 수 없는 5초대 페이스가 나왔다. 남편은 사람을 킹받게하는데 특화되어서, 그게 나를 열받아하면서도 결국엔 여러모로 능력을 향상시키니 나는 할말이 없고 그는 더욱 어깨가 올라간다.
평소 기록정도인 34분으로 통과해서 기분좋게 메달 물고 사진도 찍고 달디 단 물과 바나나도 먹었다.
다만 5km는 기록칩을 안줘서 스스로 기록을 측정해야하는게 조금 치사하게 느껴져 10km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냐 지금도 힘들어.. 그치만 조금 더 해보고싶어.. 여전히 갈등 중이다.
3. 달리기는 계속된다.
10km 출전은 아직도 정하지 못했지만 그와 별개로 달리기는 계속 하고 있다.
내가 아침에 달리는걸 주변에 알리니 갓생산다는 칭찬도 많이 받고, 알고보니 이미 달리고 있던 사람들과 관련 이야기도 재밌게 하고 있다.
여전히 런데이와 나이키런을 활용하면서 런데이에서는 10km 마라톤 준비 프로그램(안나갈거지만..!?)으로 짜주는 방식대로 수행 중이고, 나이키런에서는 나의 기록과 페이스를 확인하며 다른 사람과 건강한 경쟁의식도 느끼고 있다.(그치만 다들 왜이렇게 넘사벽으로 달리는지.. 경쟁효과는 이제 좀 덜하다.)
필요한 장비는 운동복 입은 몸뚱아리, 이어폰, 워치. 장소는 내 발 닿는 곳. 시간도 나 편한 때. 날씨의 영향은 있지만 그런 날은 신이 주신 휴식시간이라 생각하고 편안하게 쉰다.
다른 글에서 썼지만 지출을 최소화하며 가성비 있게 사는 것도 나의 재테크 방법 중에 하나인지라, 부대비용 없이 시간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운동강도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달리기가 현재 나에게 가장 좋은 운동이다.
달리면서 체력이 오르고, 활력이 생기고,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되고, 무엇보다 해냈다는 효능감에 기분이 너무 좋다. 아직 살만해서 혹은 너무 살기 힘들어서 운동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다.
여름이 되면 제약이 생겨 다른 운동을 찾을 수도 다시 늘어질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꾸준히 뭐든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