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로진 May 03. 2022

밍숭맹숭한 삶 속 잠깐의 반짝임들

5/4 개봉영화 <우연과 상상>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우리 삶에서 재미있는 것들은 대개가 우연의 산물이다. 우연히 들은 음악, 아무 생각없이 고른 영화나 책, 맛집을 검색하지 않고 들른 식당, 너무 취향에 딱 맞는 원두로 커피를 내리는 카페, 사람들이 우리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상상한다. 인생에서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내가 간절히 바라던 것들이 이루어지는 날을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그려본다. 상상이라는 건 동물 중에서 하등 보잘것 없는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고, 그렇기에 인간이 문명을 이루어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나 나를 깜짝 놀라게 할 우연에 기대어 살아갈 수도 없고, 한량처럼 상상만 하며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영화에서는 한번 해봄직하지 않을까?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3부작 옴니버스로 우연과 상상을 시각화한다.



우연한 마주침

제1화,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에서 제2화. <문은 열어둔 채로>, 제3화. <다시 한번>까지, 이 이야기들은 관계에 관해서 보여준다. 노래에서야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마주침은 우연이다.


내 절친이 사랑에 빠진 남자가 내 전남친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내 인생을 나락으로 보낸 남자를 버스에서 다시 만날 확률은? 20년 동안 그리워하던 사람을 전철역에서 만날 확률은?



이 우연한 만남들이 우리 삶을 확장시킨다. 사전에 계획된 길로만 간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은 너무나도 한정적이다. 우연히 메이코의 친구와 전남친이 썸을 타지 않았다면 2년 전의 관계를 다시 되돌아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나오가 파트너를 위해 교수를 곤경에 빠뜨리는 데 성공했다면 어떨까. 그냥 그런 부적절한 관계를 흐지부지 이어가면서, 육아와 가사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면서, 포기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으면서 살아가지 않을까.


나오는 욕망이 강한 여자다. 나오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만학도가 되었다. 동기들은 나오를 끼워주지 않는다. 파트너인 남자만 유일하게 나오와 이야기를 하지만 단지 섹스파트너일 뿐이다.

 

본인의 자아실현이라는 나오의 욕망은 뒤틀리고 왜곡되어 웬 남학생이랑 불륜을 저지른다. 불륜이라고 할 수도 없다. 남학생은 감정이 없어 보이지만 나오는 그에게 의존적이었다. 남학생은 모두가 나오를 싫어한다며 나오를 가스라이팅하고, 나오는 그런 남학생을 위해 어리석고 무모한 짓을 한다.



곤경에 처한 나오를 무참히 버린 남학생은 졸업 후 출판사에 편집자가 되어 살아간다. 곧 결혼도 한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이 순간에, 버스에서 우연히 제 손으로 인생을 망쳐놓고 모른 체한 여자를 만난다면, 이 남자의 삶은 어떻게 될까.


제3부는 '우연과 상상'이라는 제목에 가장 부합하는 이야기들이다. 전혀 사교적이지 않은 사람이 20년만에 처음으로 동창회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를 만나고 너무나 반가워한다. 오랫동안 이 순간을 상상했던 것처럼.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평생 기다려온 것만 같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동창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서로가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 사람한테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때 익명의 타자는 기꺼이 그 역할을 해준다. 꼭 금쪽같은 내새끼에서 금쪽이들에게 질문하는 코끼리 같다. 우연과 상상, 그것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우리는 얼마나 기다려왔나.



잘 실패하기

안타깝게도 영화 속 모든 인물은 실패했다. 전남친을 붙잡는 데 실패하고, 파트너와의 관계도, 학교도, 가정도 모두 풍비박산나고, 그토록 오랫동안 만나기를 기다려왔던 사람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 살아갈 것이다. 전남친을 붙잡는 대신 친구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고, 자기를 망쳐놓은 옛 파트너 앞에 당당히 나타나고,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묻어두었지만 이제 그 사람을 보낼 것이다.



제2화 <문은 열어둔 채로>에서 나오가 접근했던 세가와 교수는 연구실 문을 닫지 않는다. 윤리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의 강박도 있다. 사실은 외로운 인물이고, 타인과의 접촉을 기대하지만 언제나 문을 열어두기 때문에, 타인과 가까운 사이가 될 수는 없다. 단지 소설가로서, 작품으로만 만날 뿐이다(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두려움은 우리를 자꾸만 가로막는다.



실패가 너무도 두려웠다. 운이 좋은 편이라 내 재주에 비해 대단한 실패를 겪지는 않았지만, 20대 때는 실패할까 싶어 시작도 하지 못했다. 조금 해보다 재빨리 포기하고, 합리화하다 보니 내 손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대차게 실패를 했더라면 술 마시고 술안주로라도 쓸 텐데, 실패마저도 실패한 이야기는 아무런 재미가 없었다.


우연이 우리 삶의 지평을 넓혀주듯이, 실패 역시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갈지도 모른다. 성공하면 더 좋긴 하겠지만.


나는 언제나 이유를 찾아 헤매었다. 나의 문제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 내가 힘들게 했던 사람들, 그런 이유는 결국 내가 싫겠지, 뭐 그런 쪽으로 가곤 했다. 하지만 사실 꽤 많은 경우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다. 필연적이라 생각했던 수많은 일들 역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영혼의 쌍둥이라고 생각했던 친구와도 다시 만나기 싫을 정도로 멀어지기도 했다.


우리의 성공이 모두 우리의 덕이 아니고, 우리의 실패가 모두 우리의 탓이 아니다. 세상 많은 일들이 우연과 상상으로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그냥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우리 삶은 밍숭맹숭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별사탕이 있다. 사실 이런 마음을 먹는 것도 나는 자주 실패한다.


*


관람 포인트 : 블록버스터가 스크린을 지배하는 이 시대에 거대서사와 화려한 CG 없는 용감한 영화. 별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자꾸 웃는다. 그러면 그냥 같이 웃게 된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들도 그렇게 웃었을까?


*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청받았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연고는 없어도 고향 같은 곳, 파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