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 타임>
윌은 바에서 116시간이나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는 사람들에게 술을 막 사준다. 슬럼가에서 부자인 티를 내면 뜯기기 십상이다. 윌은 그에게 시간 많은 티를 내면 사람들이 훔쳐가니 그만하라고 주의를 주지만, 이미 늦었다. '미닛맨'이라는 시간 강도들이 그를 노리고 찾아온 것.
어쩌다 보니 윌은 그를 돕는다. 헨리 해밀턴이라는 이 남자는 사실 너무나 긴 삶에서 의미를 잃은 사람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굿플레이스>(어쩌다 보니 자주 언급하게 된다)에서처럼, 영원한 천국은 천국이 아니다.
윌은 헨리를 만나기 전까지 이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소수의 부자들이 영생하기 위해 다수의 가난한 자들이 죽어야 하는, 물가를 끝없이 올려 다수가 죽어야만 하는 시스템.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영화 속 세계에 충격받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 역시 그렇게 돌아가니까.
현재 전세계의 상위 10%가 약 80%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한국경제, 21.12.07.). 그런데도 백만장자, 천만장자는 계속해서 등장한다.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숱하게 들려온다. 그런데 화폐라는 것은 총량이 있으니 무한히 찍을 수가 없다. 무한히 찍었다가는 짐바브웨나 전후 독일과 같이 엄청난 물가상승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칠게 말해 누군가가 백만장자가 된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만큼 가난해졌다는 뜻이겠다.
헨리는 윌에게 모든 시간을 선물하고 자살한다. 윌은 형제같은 친구 보렐에게 10년을 선물한 뒤 엄마와 뉴 그리니치로 떠나 행복하게 살 생각만 했던 윌. 하지만 엄마는 버스비가 부족해 윌의 눈앞에서 죽고 만다.
그리고 윌은 결심한다. 이 세상이 이토록 불행하게 흘러가게 만드는 시스템의 비밀을 알았으니, 이제 해야 할 일은 시스템을 부수는 것이다. 그는 상류층의 세계인 뉴 그리니치로 간다. 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을 낭비하며 산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했던 1분이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카지노에서 이 귀한 시간을 걸고 노닥거린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당당하게 카지노에 입성한 윌은 포커게임으로 엄청난 시간을 딴다. 그리고 상대의 집에 초대도 받게 된다. 알고 보니 그는 전 세계 시간은행회사의 회장인 와이즈였다. 말이 은행이지, 고리대부업이다. 와이즈의 딸 실비아는 바닷가 바로 옆에 살면서 한 번도 바다에 들어가본 적도 없다. 가진 것이 많다는 건 잃을 것도 많다는 바이니 함부로 위험한 짓을 하지 않는다. 경호원도 늘 함께 다니기에 '바보짓'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실비아는 윌과 함께 처음으로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한다. 그 바보짓이라는 걸 해보는 거다. 이제 포커나 치면 되는 찰나에, 타임키퍼, 경찰이 윌을 체포한다. 타임키퍼는 윌이 헨리를 죽여 시간을 도둑질했다고 확신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둑으로 몰리기도 쉽다. 약자들은 자주 낭떠러지로 내몰리고, 해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해명의 기회, 재기의 기회는 역시 자본을 가진 자들의 것이다. 영화 <홀리데이>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친다.
우리의 윌은 실비아를 납치해 타임존으로 달아난다. 그리고 이들은 시간을 가지고 딜을 시작한다. 윌의 목표는 시간을 독점하는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것. 그리하여 모두가 시간을 넉넉히 가지는 것. 자본주의 현실로 비유하면 사회주의 혁명이다. 사회주의 혁명에 자본가의 딸을 납치할 생각을 하다니, 기가 막힌다.
어느새 실비아는 재벌가의 공주가 아니라 혁명가가 되었다. 딸이 시간이 없어 곧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착취한 시간들, 누군가는 그 1분이 없어 죽어가는 현실이 실비아의 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시간만 많지 껍데기 같은 불안한 삶이냐, 혁명가의 삶이냐라는 기로에 높였을 때, 실비아는 혁명가를 택한다.
협상에 응하는 척하며 와이즈에게 돌아간 실비아와, 와이즈의 뒤통수를 친 윌은 와이즈의 금고로 간다. 금고를 열면 와이즈가 돈놀이 아닌 시간놀이로 축적한 시간이 있다. 비밀번호는 사랑하는 딸의 생일? 그럴 리 없다. 황당하게도 찰스 다윈의 생일이다.
'적자생존'을 제멋대로 오해하는 천박함이 만들어낸 세계, 우리에게도 왠지 머지 않은 것 같다. 적자생존은 환경에 적응한 개체만이 살아남는다는 찰스 다윈의 이론이다. 그의 진화론은 기독교중심 사회에서 과학중심 사회를 열었다. 하지만, 다윈은 인간을 적자생존의 예외로 보았다. 인간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데도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행동을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가 힘이 세지도, 모두가 아름답지도, 모두가 똑똑하지도 않다. 그러나 누군가가 도태되지 않도록 서로를 지킨다. 그것이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동물들과 다른 이유이며, 그 덕에 힘도 없는 인간이 상위포식자로 살아남았다. 우리에겐 연대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최소한의 동정이 있다. 윌이 자신을 잡으려는 타임키퍼가 죽어가는 걸 보고 타임키퍼에게 얼마 안 남은 시간을 나눠주고, 혼자 잘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고향의 가난한 이웃들에게도 시간을 나누어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그 최소한마저 없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영화가 시간을 화폐로 사용하는 SF라기에는 사실 너무도 현실적이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이 많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이 든다. 가진 자들이 차를 타고 10분만에 도착할 거리를 대중교통을 타고, 혹은 걸어서 30분, 그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누군가는 대학을 4년만에 졸업하고, 또 누군가는 돈을 버느라 5년, 6년만에 졸업하기도 한다. 정말로, 가난에는 돈이 들고, 이자가 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