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로진 Apr 08. 2021

[넷플릭스 영화] 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

사랑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스포가 있습니다.


*


청소년기는 불안하다. '나'밖에 없던 세상에 갑자기 '세계'가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나와 세계의 간극을 인지하는 동시에 타자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무언가가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거나, 친구와 나를 일치시키기도 한다. 또래집단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는 어떤 감성을 가진 어른이 될지를 좌우한다. 학교폭력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데, 가장 마음이 아픈 건 자아가 형성되는 이 시기에 한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렸고, 그것이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폭력 뒤에는 트라우마가 남는다.


출처: 네이버 영화


노래며 영화며 유행처럼 제목이 길다. 직관적이어서 한번에 이해할 수 있긴 하나 이제 사람들이 은유를 이해할 수 없게 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편 <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는 직관적인 듯 보이지만 제목만으로 내용을 유추하기는 어려웠다. 원제인 <All the Bright Places>를 <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로 번역한 건 <보니 앤 클라이드>를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로 번역한 것과 비슷하겠다.


전형적인 하이틴 영화는 아니다. 하이틴 영화라 하면 축제 같은 데서 우연히 만난 청소년들이ㅡ이때 여학생이 모범생이고 남자에게 관심이 없거나, 남학생이 찐따 캐릭터로 무리에서 서열이 낮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ㅡ 어쩌다 보니 사랑에 빠지고, 어쩌다 보니 주변에서 모함하고, 어쩌다 보니 극복하지만, 대입이 그들을 가로막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난관을 다 극복한 후 해피엔딩.


매일 조깅을 하는 시어도어 핀치는 같은 학교 학생인 바이올렛 마키를 만난다. 바이올렛은 다리 난간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다. 당장이라도 뛰어내릴 기세다. 시어도어는 바이올렛을 잘 구슬려 다리에서 내려오게 한다. 바이올렛이 궁금해진 시어도어는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친해질 구상을 한다. 하이틴 영화의 상큼하고 기분좋은 부분들이다. 어른들에게서 보이는 질퍽한 욕망 같은 게 보이지 않으니까.


시어도어는 바이올렛의 상처를 본다. 교통사고로 언니를 잃고, 생존자에게서 보이는 죄책감 같은 것들. 시어도어는 마이애미의 아름다운 곳을 소개하는 숙제를 빌미로 바이올렛과 함께 한다. 각종 어려움에 봉착하나, 시어도어는 끈질기다. 여기까지만 보면 시어도어는 굉장히 밝고 에너제틱한 친구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시어도어의 방에는 온갖 문구로 채워진 포스트잇이 가득하다. 학교에서는 정신적인 문제로 상담을 받고 있지만 불성실하며, 학교에서는 '괴물'이라 불린다. 가끔 사라졌다 나타나는데, 시어도어의 친구들은 '원래 그렇다. 곧 돌아온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바이올렛도 시어도어의 어두운 면들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그는 별일 아니라고 할 뿐이다.


이들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의 영상미에 빠지게 된다. 처음으로 갔던 '마이애미에서 가장 높은 곳'. 해발 300미터가 조금 넘는 언덕과 낡은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는 모습, 꽃과 호수, 낡은 오두막. 내가 선생이라면 그런 곳을 찾으라고 숙제를 내어주었을 것 같다.


아주 가까워진 두 사람. 하지만 학교에서 시어도어 핀치는 여전히 괴물이다. 바이올렛에게 핀치를 조심하라는 말을 하는 남자애를 핀치가 패버리고, 또 숨어들어간다. 바이올렛은 핀치를 찾아 그의 집에 갔다가, 벽에 붙은 수많은 포스트잇을 본다.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버린 핀치. 바이올렛은 핀치로부터 위로를 받고 상처를 조금씩 치유했던 것처럼 그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보려고 한다. 하지만 핀치는 집안 살림을 다 부술 듯이 하고는 집을 나가버린다. 그리고 또 사라진다. 그가 발견된 곳은 둘이 함께 뛰어들었던 호수. 지구 반대편으로 이어져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그 호수에서 시어도어의 운동화와 옷이 발견된다.


말할 수 있는 상처들은 이미 어느 정도 극복한 상처일 것이다. 너무 아픈 것들은 차마 꺼내어 볼 수도 없어서 마음 속 어딘가에 숨겨두고 꽁꽁 얼려버린다. 다시는 꺼낼 수도 없게. 그래서 별 거 아닌 걸로 치부하기도 쉽다. 때로는 상처 많은 사람들이 더 밝아 보인다. 그들은 스스로의 상처를 돌보는 것이 두려워 남의 상처들을 대신 어루만진다. 그리고 우연히 타인이 자신의 상처를 보았을 때 전속력으로 도주한다. 시어도어는 그런 인물이다. 그러므로 영화에서도 시어도어의 서사가 부족하다. 그의 우울과 불안과 폭력성을 대변해 줄 이야기가 없다.


시어도어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이제 나도 준비되었으니, 다시 시작해 보자고 말하기를 기다렸다. 100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 내내 위태하고 불안했다.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건 폭력적이다. 이런 이유로 우울하고, 혹은 이런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서사가 없을 때, 사회는 우울증 환자를 비난한다. 의지가 부족하다, 남들도 다 그만큼 힘들다, 너만 유난이다, 예민하다.


"깨어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시어도어는 깨어 있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깨어 있는 게 대수냐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저 깨어 있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진 힘을 다 쓰기도 한다.


이 영화의 미덕이라 하면, 친구의 자살 후 남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준 것이다. 자살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빠지지 않고, 바이올렛은 시어도어와 함께 했던 여행을 발표하며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를 말한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그와 함께한 여행의 궤적을 다시 한 번, 그것도 스스로 운전하여 따라간다. 어쨌든 우리는 살아내야 한다. 눈부신 세상 끝까지, 너와 내가 함께 가면 좋겠다.


*


정말 좋았지만 너무 아파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영화들이 있다. 아마 나는 다시 이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해 둔다.

작가의 이전글 [넷플릭스 영화] 열혈남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