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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Apr 07. 2021

[넷플릭스 영화] 열혈남아

멋이란 무엇인가

 스포가 있습니다.


*


왕가위 영화의 매력은 화려한 색채감과 대비되는 공허함에 있다. 열혈남아는 왕가위 감독의 데뷔작으로, 1988년에 개봉했다. 34년이나 된 영화다. 제목에서부터 피끓는 남자의 멋을 담았을 것만 같다. 그놈의 멋이 뭐길래.


출처: 네이버 영화


아화에게 사촌동생이라는 아어가 별안간 찾아온다. 도시에 있는 병원을 가야 한다는 이유인데, 거기에서부터 이상하다. 아화와 아어는 "저에게 사촌동생이 있었나요?'라고 물을 정도의 사이다. 완전 남남이라는 말이다. 서로의 존재도 모르는 사촌오빠 혼자 사는 집에 다 큰 여자애를 보내다니. 게다가 친척이라면 뭘 해서 벌어 먹고 살아야 하는지 정도는 알 텐데 건달에게 애를 맡긴다는 것부터 갑갑했다.


아화는 13살 때 처음 사람을 죽인 후로 뒷골목을 전전하는 건달이다. 한때 잠깐 유명했지만 이제는 그저 그런 건달. 토니와 아화는 같은 형님을 모시고 있지만 대립관계다. 토니는 끌고 다니는 동생들이 많은데 아화는 안타깝게도 딱 한 명, 플라이(우잉) 뿐이다. 그런데 이 플라이라는 놈이 대책이 없다. 능력도 안 되면서 허세만 가득하고, 가는 데 마다 사고를 치고 다닌다. 여기서 다시 갑갑해진다.


아화의 애인은 사창가에 있고, 임신했는데 아화가 연락이 되지 않아 중절한다. 아화는 애인을 찾아갔다가 그 소리를 듣고 얼굴을 뭉개면서 폭력적으로 대응하고, 집에 와서는 사촌동생인 아어에게 소위 '벽치기'라 부르는 폭력적인 행동을 한다. 집에 있는 유리잔도 다 깨버린다. 그런데도 다음 날 아침, 밥을 차려주는 아어. 갑갑함의 연속이다.


사고 치고 다니는 플라이를 사람 만들어 보겠다고 어묵장사를 시켜 보아도 플라이는 어묵장사 같은 거 하고 싶지 않고, 멋있고 폼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싸움도 못하면서. 영웅이 되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은데 능력은 하등 없다. 아화는 플라이 뒤치닥거리를 할 뿐이다. 플라이가 빚진 돈 받아내고, 플라이 대신 싸우고, 플라이가 어디서 얻어 터지고 있으면 가서 같이 두드려맞고. 이것이 피 끓는 남자의 일인가?


아어는 병원 진료 결과가 괜찮다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유리컵을 박살낸 아화를 위해 유리컵도 새로 사놓는다. 하나는 숨겨두었는데, 또 박살냈을 경우에 전화하라고 편지를 써 둔다. 별안간 아어를 보기 위해 시골로 내려간 아화. 아어는 시골 의사와 결혼할 계획이었으나 아화를 보고 마음을 바꾼다. 아주 잠시, 정말 잠시 아어와 아화의 평범한 일상이 그려진다. 그러다가 또 문제의 플라이 때문에 주룽으로 돌아가고, 얻어 터지고의 반복.


경찰에 증인으로 서게 된 전 조직원을 암살하는 일까지 맡아버린 플라이. 이 역시 영웅이 되고 싶은 플라이의 허세 때문에 맡은 일이다. 아화는 하지 말라고 하지만 기어이 조직원을 죽이러 간다. "3분을 살아도 영웅처럼 살고 싶어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다. 우리의 아화는 그 소식을 듣고 또 아어를 버려두고 플라이에게 간다. 아화가 도착했을 때 플라이는 이미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럼 그냥 가면 되는데 굳이 거기다 대고 총질을 한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아화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무엇인가. 홍콩 시골 청년들이 도시로 올라와 어떻게든 먹고 살아보려고 한 이야기인가. 아니다. 어떻게든 먹고 살 거였으면 건달이 되면 안 됐다. 제목 그대로 피 끓는 남자의 욕망인가. 플라이만 보면 그렇다. 뭔가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나지만 무능함이 발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으니 피가 끓긴 하겠다. 청춘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고통받는 시기이니까.  


아화는 옛 애인에게도, 아어에게도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어떠한 확답도 주지 않는다. 그저 여자들만 전전긍긍할 뿐이다. 여자에게는 이토록 무책임한 아화가 플라이에게는 사랑 이상을 준다. 플라이가 겁을 주자 무릎을 꿇는 토니를 보고 토니의 동생들이 모두 토니를 외면하는 것처럼, 플라이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해도 편 들어준 아화의 말을 너무도 쉽게 무시한다. 의리를 지키는 건 아화 뿐이다. 대단한 연대가 아닐 수 없다.


멋있게 살고 싶지만 능력은 없고, 떵떵거리며 살아보고 싶은 플라이. 어릴 적 새아버지에게 엄마를 뺏김으로써 그에게 남성성에 대한 열등감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남성성을 동경하지만 무능력한 마초이즘의 말로는 자기보다약한 자들 위에 군림하는 것 뿐이다. 불쌍한 플라이. 동네 골목대장도 못 해봤다. 그래도 어찌되었든 본인이 생전에 원한 대로 결국 신문에 나긴 했을 거다.


*


열등감을 내재한 마초는 위험하다. 수많은 범죄에서 그 예를 확인할 수 있다. 왕가위 영화를 정말 좋아해도 <열혈남아>에서 좋았던 부분은 그 유명한 공중전화 키스신보다 아화가 아어의 알바를 도와주는 장면이었다. 검정색 짧은 바지(팬티인가)를 입고 닭튀김 상자를 한 손으로 번쩍 들고 가는 아화의 뒷모습은(유덕화의 뭔들 아니겠냐만) 정말 멋있었다.


당대에 유행하던 느와르의 전형을 살짝 비틀었다는 점이 물론 훌륭하긴 해도 싸움들은 조잡했고, 무의미했고, 범죄자에게 이상한 서사를 갖다 붙이는 건 더 싫었다. 여러모로 갑갑한 영화다. 감독의 첫 영화이니 그럴 수도 있다 생각한다. 대부분의 청춘은 조잡하고 조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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