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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Apr 06. 2021

<사바하>, 잘 만든 한국형 오컬트

스포가 있습니다


*


장재현 감독의 <검은사제들> 이후로 꽤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오컬트나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지 않지만 감독의 디테일들이 매력적이었다. 강동원에게만 비친다는 소문의 후광은 못보았다. 사바하에 대한 해석이 굉장히 많다. 그만큼 수용자로에게 많은 걸 던져주고, 인과관계를 엮기 좋은 영화다. 어떤 종교적 상징들은 굳이 수수께끼처럼 풀지 않아도 눈에 보인다.


출처: 네이버 영화


사바하는 '이루어지게 하소서'와 뜻을 같이 하는 진언이다. 불자가 아니어도 이름은 들어보았을 <반야심경>의 마지막 경구도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못지 사바하'로, 무언가를 바라는 간절히 바라는 산스크리트어다. 그렇다면 뭘 바라는지가 중요하겠다.


영화는 종교계 이단을 파헤치고 다니는 박웅재 목사의 설교로 시작한다. 자신들의 믿음을 이단이라 하는 목사를 공격하는 집단도 보인다. 우리나라 종교는 큰 줄기가 몇 개 있다. 거기에서 뻗어나온 잔가지들이 굉장히 많아 해석에 따라 어디까지를 이단으로 볼 것이냐가 달려있다. 맹목적인 믿음을 이용하여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자들을 우리는 수없이 많이 보았다.


어찌됐든 박 목사는 이단을 찾아다니는 게 돈벌이다. 이번에 파고들어간 '사슴동산'은 불교의 한 종파처럼 보이지만 수상한 냄새가 난다. 강원도 영월에서 의문의 살인사건들이 발생하고 수많은 아이들이 실종된다. 그리고 영월에는 '그것'이라 불리는 아이와 그 때문에 역시 숨어 지내는 금화가 있다. 금화는 16년 동안 감금되어 있는 쌍둥이 언니에게 밥을 준다. 그것이 죽어버렸으면, 그것이 없어졌으면 하며 평범한 일상을 바라는 중학생이다. 크리스마스날 그것의 밥에 농약을 타고 집을 나가려고 하지만, 다시 돌아와 밥그릇을 차버린다. 따뜻한 스웨터도 놓고 간다.


'광목'은 수많은 살인을 사주하고 직접 행하기도 했으나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 불안할 때마다 경전에 있는 그 문구들을 외워 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의 불안을 잠재워주는 건 아주 어린 시절에 엄마에게 들었던 자장가.


그것은 얄궂은 소리를 내며, 뱀을 보내며 접근하는 이들을 쫓아낸다. 하지만 광목만은 예외다. 광목은 그것에게 다가갔다가 뱀 대신 그것의 손에 발목을 붙잡힌다. 그것으로부터 도망친 광목은 금화를 납치하여 지금까지 영월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들이 죽임을 당한 방식으로, 팥과 부적을 두고 기도한다. 금화는 묻는다. 왜 죽어야 하냐고. 그리고 죽일 거라면 쌍둥이 언니도 같이 죽여서,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광목은 그것을 찾아간다. 그것은 땅을 파고 파고, 끝없이 파내려가 무언가를 발견한 뒤 자신의 몸을 뒤덮은 털을 깎아내고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진 부처의 모습으로 그를 기다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광목만을 기다렸다. "나는 울고 있는 자니라. 너를 기다렸다."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광목에게 그것은 엄마의 자장가를 들려준다.


미륵이라 불린 김제석. 김제석은 소년 교도소에 있던 네 명의 아이를 양자로 삼는다. 네 명의 아이들은 각자 미륵의 곁에 있는 사천왕이 된다. 1899년생 김제석이 태어난 땅에서 100년 뒤 그의 천적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사천왕들은 1999년생 여자 아이들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김제석을 지킨다. 그러므로 교도소에서 네 명의 남자아이들을 살인병기로 쓰는 동시에, 너희들의 시궁창 같은 삶 또한 구원받으리라, 하고 아이들을 꼬셨을 것이다.


김제석도 훌륭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신이라 불린 사나이였다. 하지만 자신의 선(善)이 타인의 시선을 받을 때 목적없던 선에 목적과 욕망이 생긴다. 남의 손에 피를 묻혀 목적을 이루던 김제석은 시종일관 흰옷을 입고 있다. 하지만 코끼리와 광목을 총으로 쏜 뒤에는 동물의 털로 된 검은 옷을 입는다.


그것이 광목의 발목을 붙잡은 것처럼, 전복된 차에서 광목은 김제석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리고 그것이 건네준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김제석은 불에 타고, 그때 하늘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불꽃이 터진다. 크리스마스는 아기예수의 탄생을 위해 수많은 아이들이 대신 죽어야 했던 슬픈 날이라는 박 목사의 말처럼, 김제석이 신이 되기 위해 수많은 99년생 여자 아이들이 죽어야 했던 날들이 끝났다.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만 유신론자에 가깝다. 그러면서 동시에 진화론을 믿는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신이 어딘가에 있긴 한 것 같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니, 그 모습이 필시 건강한 백인 남자의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신이 있다면 외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수많은 장면들을 우리는 매일 목격한다. 신이 있다면 세상을 이렇게 두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곳이 신이 만든 지옥이라면 어떨까. 생로병사가 존재하는 이 세계가 지옥의 모습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생로병사의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붓다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고행했다. 니체의 영원회귀와도 비슷하다. 영원히 다시 태어나서 고통받고, 병들고, 죽기를 반복하는 지옥. <무간도>에서 무간지옥을 죽지도 못하는 지옥이라 한 것처럼. 그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뿐이다.


차라리 이 세계가 지옥이라 생각하면 지옥을 잘 즐길 방법을 찾는 편이 마음 편하겠다. 그보다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다시 안 태어나는 쪽이 좋겠다. 광목은 금화를 죽이려 하기 전에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 말한다. 미륵을 위해 희생했으니 말이다.


김제석은 사천왕의 순교로 신이 되기를 바랐다. 그것은 김제석을 죽이기를 바랐다. 광목은 믿음에 의지하여 구원받기를 바랐다. 티벳 승려의 예언은 적중했다. 1999년에 태어난 그것은 김제석을 죽일 광목을 기다렸다. 광목은 깨달음을 얻은 불교 성자 나한처럼, 잘못된 믿음이었음을 깨닫고 그것을 대신하여 김제석을 죽인다. 그것 역시 김제석의 죽음과 함께 죽는다. 광목의 본명은 정나한이다.


*


외로움은 삶을 좀먹는다. 외로운 자는 잘못된 믿음에 빠지기도 쉽다. 어떤 악인들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한다. 우리는 나약하고, 지옥(같은 곳)에서 매일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이곳에 이유도 모른 채 내던져졌다. 나는 지옥의 수많은 미끼들ㅡ삶을 더 지옥으로 만들어주는ㅡ에 쉽게 중독되어 무지몽매해지기 일쑤이지만, 어쨌든 깨어있어야 한다.


무엇을 바랄 것인가. 신이 되기를, 영원히 죽지 않기를, 부자가 되기를, 사랑받기를, 신은 우리의 바람들을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 끝무렵 박 목사의 내레이션이 인상 깊었다. 어디 계시나이까. 우리를 잊으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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