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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Apr 16. 2021

[왓챠 영화] 타락천사(리마스터링)

스포가 있습니다.


*


영화를 보는 관점은 저마다 다르다. 나는 스토리보다는 영상미에 치중하는 타입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라도 영상이 아름다우면 쉽게 매료된다. 어릴 때부터 왕가위를 비롯한 홍콩영화를 좋아했다. 우리 아빠도 홍콩영화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모른다. 아빠는 영화를 보다가 자주 잠들었다. 아빠가 보던 영화는 OCN에서 수없이 방영되던 영화였기 때문에 언제고 다시 볼 수 있었다.

오래 전 낡은 주택 2층에 세를 들어 살던 나는 작은 방에 꽉 차는 침대 위에서 벌겋게 껌뻑이는 왕가위 영화를 틀어놓고 잠들곤 했다. 자다 깨면 뭔가가 먹고 싶어졌다. 그럴 때마다 아빠처럼 물컵에 소주를 반 정도 따라놓고 꿀꺽꿀꺽 마시고 다시 잠들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첨밀밀>에서 그리도 순수한 소군을 연기했던 여명이 <타락천사>에서는 킬러다. 홍콩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그 시절 찬란했던 배우들을 보는 맛일진대, 이 영화에서는 여명을 사랑해야 할지 금성무를 사랑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둘 다 사랑하게 된다. 물론 2021년의 여명, 금성무가 아닌 1995년의 그들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킬러 황지명은 155주나 함께 일한 파트너와 일면식이 없다. 킬러라는 직업은 파트너와 사적인 감정을 나누면 안 된다. 파트너는 킬러의 방을 정리해주는 일을 한다. 대관절 킬러의 방을 왜 정리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한다.

파트너는 킬러의 흔적들에서 그 사람을 조금씩 상상하고 추측한다. 만난 적이 없어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그 사람의 냄새, 흔적, 소지품, 영수증만으로도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베르그송은 기억은 머리가 아닌 물질에 있다는데,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베르그송적이다.


5살 때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고 탈이 나 말을 못하게 된 하지무, 수감번호 223. 익숙한 얼굴과 이름, 번호다. <중경삼림>의 일부가 될 수 있었던 이야기가 <타락천사>로 떨어져 나오면서, 임청하의 어깨에 기대 있던 하지무가 말 못하는 하지무가 됐다. 수감번호 223의 머그샷은 길이길이 남을 금성무의 인생장면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중경호텔에서 아버지와 함께 산다. 특별한 직업은 없고, 장사를 마친 가게에 들어가서 주인 행세를 한다. 그 주인 행세의 방법이 무척 폭력적이다. 머리 감을 필요 없다는데 강제로 머리를 감기고, 아이스크림을 배가 터지도록 먹인다. 하지무의 엄마는 아이스크림 트럭에 치여 죽었다.


전단지를 돌리다 알게 된 여자 찰리. 그 여자는 '금발령'이라는 여자가 자기 남자친구 조니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한다. 하지무와 오토바이를 타고 금발령이 사는 맨션으로 가 보지만, 금발령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무는 금발을 한 인형을 가지고 오는데, 찰리는 그 인형이 금발령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금발령은 허구의 인물인 것 같고, 조니도 실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찰리의 기억은 뭐가 어떻게 엉크러진 걸까. 어쩌면 조니와 금발령이 언젠가 실재했고, 찰리의 집착은 상처받은 인간의 분열일 수도 있겠다.


파트너는 황지명이 자주 가는 술집 정보를 알아내 그 술집에 가서 기다리고, 황지명은 그 사실을 안다. 이제 그 일을 그만하고 싶다고 말하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맥도날드에서 감자튀김을 먹고 있는 황지명 옆에 다가온 이상한 여자, 베이비. 결국 황지명을 자기 집까지 데리고 오는 데 성공한다. "부산식품"이라는 한국어가 쓰여 있는 건물이다.


비에 젖은 옷 대신 베이비의 집에 있던 티셔츠를 입은 황지명. 티셔츠가 너무 잘 맞는다. "이 옷 누구 거지?"(개인적으로 이 대사를 하는 황지명이 가장 섹시해 보였다. 그냥 취향이다.)라는 물음에 우리가 만난 적이 있고, 예전에 자길 베이비라고 불렀다는 베이비. 황지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사이 파트너는 황지명을 그리워하며 혼자 운다.


찰리를 그리워 하다 혼자 남겨진 하지무는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직장을 구한다. 일본인 사토 씨가 운영하는 이자카야다. 거기서 딱 한 번 황지명을 만난다. 사토 씨는 가정적인 아버지다. 자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캠코더로 영상을 찍는다. 예전에 영화감독이었단다. 하지무는 캠코더에 강한 흥미를 느끼고, 중경호텔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캠코더에 담는다. "사진을 많이 찍히면 단명한다는데" 라는 하지무의 말처럼,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시고 하지무는 중경호텔을 떠난다. 아버지가 딱 한 번 녹화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날 아버지는 많이 웃으셨다. 그리고 그날은 아버지의 환갑이었다.


베이비와 파트너가 지하통로에서 마주친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냄새가 난다"가 이 장면을 오마주한 듯 싶다. 황지명의 냄새를 서로 인지한 두 여자. 파트너는 황지명을 만나고 싶다고 전하고, 베이비도 황지명에게 전한다. 황지명은 베이비가 울고 불고 말려도 파트너를 만나러 간다. 이미 한 번 잊어놓고, 이제서야 잊지 않겠다고 말하며.

파트너를 만난 황지명은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파트너는 미친듯이 손을 떨며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마지막 출장.


마치 중경삼림의 가게를 연상하게 하는 곳에서 하지무가 소스통을 흔들고 있다. 왠지 <캘리포니아 드림>이 들려올 것만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그리고 또 중경삼림에서처럼 전화를 하고 있는 승무원 여자. 첫사랑 찰리다. 하지만 찰리는 하지무를 알아보지 못하고, 하지무가 무슨 난리를 쳐도 눈길도 주지 않는다. 하지무는 찰리가 자신을 못 알아보는 이유가 "너무 멋있어져서"라고 생각한다.


이후 또 다른 폭력의 현장에서 혼자 태연히 뭘 먹고 있는 파트너(이제 황지명의 파트너는 아니다). 그 뒤로 피를 흘리는 하지무의 모습이 보인다. 여자는 하지무에게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한다. 하지무의 오토바이 뒤에서, 누군가와 가까이 있는 게 너무 오랜만이고, 곧 내려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그 순간의 따뜻함을 느낀다.


*


"옷깃이 너무 많이 스쳐 닳을 지경이었지만 계속 아무 일도 없었다"는 하지무의 대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첨밀밀>에서 돌고 돌아 만나게 되는 인연이 있었다면, <타락천사>에서는 죽어도 안 되는 인연이 있다. 영영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는 반면, 너무도 쉽게 잊히는 기억도 있다.


<타락천사>는 딱히 어떤 내용이라 딱 집어 말하기는 어렵고 그냥 미장셴의 극치라 할 수 있다. 퇴폐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타락천사>를 보라고 할 것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한 편의 시 같고 어떤 그림 같다.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겠다. 다만 시간이 흐른 뒤에도 영화의 잔상이 자꾸만 깜빡거린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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