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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진 Mar 08. 2022

바로 지금, 이 순간은 진짜!

영화 <프리 가이> / 디즈니 플러스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4차 산업혁명이 위시하는 이 세계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모르고 게임도 하지 않고 메타버스에 접속할 일이 없는, 나 같은 3차 산업혁명 시대의 사람에게는 너무도 낯설다.

AI에게 인격이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숱한 작품들에서 다루어져 왔다. AI 이전에는 복제인간이 있었다. 영화 <아일랜드>에서 클론에게 인간과 똑같이 자의식이 생기는 모습을 보며, 당시의 나는 꽤 두려워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복제인간일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아일랜드>로부터 15년이 지났지만 조던 필 감독의 <겟 아웃>을 보면서도 덜덜 떨었다.


이제는 인간복제의 시대가 아니라, 가상인간 시대가 온 것 같다. 이미 AI 버추얼 인플루언서가 실제 사람처럼 행동한다. 행동하는 것은 누구의 의지일까. AI 인플루언서를 프로그래밍한 사람일까, AI에게 인격이 생겨버린 걸까.


에스파가 4인조가 아닌 8인조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황당함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했지만... 사람들은 에스파의 세계관을 받아들인다. 이제는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다. 물론 지금 에스파의 'æ-에스파'들은 3D 애니메이션에 가깝다. 그에 비해 AI 버추얼 인플루언서는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진짜 사람 같다.


출처: 네이버 영화


<프리 가이>의 주인공 '가이'는 '프리 시티'에 산다. 은행원인 가이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보낸다. 금붕어에게 인사하고, 커피숍에서 늘 같은 커피를 마시고, 은행에 강도가 들어오면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르고, 퇴근하고, 또 아침이고, 출근하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매일 똑같이 "좋은 하루 보내지 마세요. 최고의 하루 보내세요!"라고 인사하는 가이는 40 가까이 연애 한 번 못해본 '모쏠'이면서도 자신과 커피 취향이 같고, 5옥타브의 여자 가수 노래를 좋아하는 여자라는 구체적인 이상형이 있다.


존재에 대한 의심과 자각 없이 반복되는 가이의 일상에 특이점이 나타난다. 5옥타브의 여자 가수 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자, '몰로토프 걸'을 만나게 된 것.


그 이후로 가이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과 자신의 '차이'를 알게 된 후, 선글라스를 빼앗은 가이의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자아 또한 확장되기 시작하여, 처음으로 그동안 마시던 커피가 아닌 카푸치노를 주문해 보는데, 바리스타와 늘 인사하던 경관 등 모든 사람이 당황한다. 이 장면은 마치 <트루먼쇼>의 트루먼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을 때와 비슷하다. 가이가 선글라스를 껴보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인지한 후 절친인 버디에게도 선글라스를 껴보라고 했지만 버디는 삶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가이와 가이의 친구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현실이 썩 만족스럽지 않아도 변하는 것은 두렵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삶 속에 자신을 밀어넣는 모습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NPC일까? 우리가 NPC라면 주인공은 누구인가. 가이는 NPC가 되기 보다는 주인공이 되기를 택한다.


그래서 가이는 몇 번의 죽었다 살아나는 시도 끝에 몰로토프 걸과 말을 섞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몰로토프 걸은 레벨이 100이 넘고 자신은 1밖에 안 되니, 레벨부터 올려야 한다. 그때부터 가이는 사람을 죽이는 대신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레벨을 올린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 모두는 알고 가이는 모르는 사실. '프리 시티'는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다. NPC인 가이는 선글라스 낀 사람-실제 사람들과 대화를 하지도, 싸우지도 않아야 한다. 그런 가이가 갑자기 각성을 하고, 가이를 지켜보는 현실세계의 사람들은 가이에 환호한다. 가이의 게임 속 스킨인 은행원 셔츠를 따 '블루 셔츠 가이'라는 별명까지 생기고, 혹자는 가이가 정체불명의 천재 해커라는 음모설을 제기한다.


가이가 이상형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몰로토프 걸은 AI 캐릭터가 아닌 사람 '밀리'이니까. 게임회사 '수나미'의 대표 앤트완(앙투완)은 개발자인 '키스'와 '밀리'의 게임 '라이프 잇셀프' 코드를 훔쳐서 '프리 시티'를 만들었는데, '프리 시티2'를 출시할 계획이다. 그러나 블루 셔츠 가이가 인기를 얻게 되면서 난감해진다.


게임 코드의 개발자인 키스는 수나미에 들어가 앤트완 밑에서 일한다. 자신이 만든 세계를 되찾기 보다는 수나미에서 별 욕심 없이 일한다. 밀리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기업인 수나미 앞에서 일개 개인은 힘이 없다. 그러나 게임 속에 코드를 숨겨두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몰로토프 걸'로서 끝없이 게임 속을 헤맨다. 그러다 가이를 만나고, 게임 속에서이지만 가이에게 호감이 생긴다. AI라는 것을 알면서도.


몰로토프 걸과 가이는 게임 속에서 만났을 뿐인데도 취향이 너무 비슷하다. 그네를 좋아하고, 풍선껌맛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고...


수나미는 '프리 시티2'의 론칭을 위해 블루 셔츠 가이를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레벨업을 한 가이를 죽이기가 쉽지 않다. 결국 앤트완은 전 세계의 유저들을 무시한 채 리부트를 감행하고, 가이는 원래의 가이로 돌아간다. 그때 키스는 가이의 소스가 다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가이가 처음 각성했을 때처럼 해보면 어떨까? 바로 몰로토프 걸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다.


몰로토프 걸의 키스와 함께 모든 기억이 되돌아온 가이는 자신과 같은 NPC를 해방하고자 한다. 누군가의 설계대로 만들어졌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해방이다. NPC들은 파업을 시작한다. 키스 역시 앤트완에게 반기를 든다. 앤트완은 결국 서버를 물리적으로 박살내는 것을 택한다. 그러나 가이는 사랑하는 몰로토프 걸을 위해 바다 건너 밀리와 키스의 코드까지 달려간다.


앤트완과의 딜로 겨우 구해낸 '라이프 잇셀프'는 성공을 거둔다. 몰로토프 걸은 '누군가에 의해 프로그래밍되었겠지만'이라는 가이의 사랑 고백을 통해, 풍선껌맛 아이스크림과 그네, 5옥타브 여자 가수의 노래, 커피 취향이 바로 자신의 것이었음을, 그리고 가이가 몰로토프 걸을 만나면 사랑에 빠지게끔 프로그래밍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때 밀리에게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


가이의 각성은 이상형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데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선글라스 낀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 모든 것이 가짜가 아닐까 하는 의심. <트루먼쇼>, <매트릭스>와 맥락을 같이 한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의미없는 반복, 차이를 만들어나가는 것에 대해 말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프리 가이>는 충분히 들뢰즈적이다. 의미없는 반복의 굴레에서 살아가던 가이와 친구들, NPC들, 그리고 키스도 특이점을 발견한 후 차이를 만들어간다. 차이를 만들어나가는 삶은 그 전과 같을 수 없다. 모든 캐릭터들이 반복적이고 수동적이던 삶에서 자신을 능동적으로 굴려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키스와 밀리가 만든 '라이프 잇셀프'는 스스로 발전하는 AI들을 관찰하는 게임이다. 발전한다 함은 이전과 다른, '차이'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캐릭터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다. 직업적인 성취, 똑같은 생활이 아니라 창조적이며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게임 밖 사람들은 진짜 사람 같은 게임 속 AI들의 발전을 응원하고 지켜본다. 마찬가지로 프리 시티에서의 가이가 불가능할 것 같은 싸움을 마치고 바다 건너 세계로 달려가는 것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의심하지 않으면 반복할 수밖에 없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헐벗은 반복'. 무한히 반복되는 삶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세트장 속 트루먼의 삶, 빨간 약을 먹기 전 네오의 삶, 앤트완 밑에서 시키는 것만 하던 키스의 삶은 진짜일까.


아무리 게임 속이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고 성장해나가는 AI들에게 그 세상은 가짜가 아니다. 생각하고 느끼고 숨쉬고 있음을 느끼는 지금-여기가 바로 진짜 세상이다.

(매번 실패하지만, 그런 이유로 명상을 하라는 게 아닐까 싶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사람 같지 않은 것과 사람 같은 것이 섞여 산다. 때리고 죽이고 배신하는, 사람 같지 않은 인물들이 이끌어가는 서사가 판을 치는 가운데, 인간이 서로를 돕고 스스로, 또는 누군가의 조력으로 성장하는 모습, 사람 같은 영화였다. 물론 주인공이 사람은 아니지만.


관람 포인트

* 라이언 레이놀즈는 그냥 가이가 아니라 핫 가이다.

* 앤트완 역을 맡은 타이카 와이티티의 연기가 킹받는다.

* 크리스 에반스가 영화 속에서 잠깐 킹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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