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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브', 그들은 실재하는가?

버추얼 아이돌을 라깡으로 해석하기

by 명지바람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들이 존재하는 세상. 단순히 물성(物性)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존재들이 현실 세계에 범람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를 유령이라고 칭했겠지만, 현실에 사는 사람에게 이는 대단히 곤혹스러운 문제다. 존재하지도 않는 이를 과연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정말 없는 존재라고 무시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존재한다고 받아들이고 이를 진지하게 대해야 하는가?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이 이야기의 대상은 버추얼 아이돌 '플레이브'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라디오 DJ인 김신영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했다. 버추얼 아이돌인 '플레이브'를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어렵겠다는, 사담에 가까운 이야기를 한 것이 외부에 드러나면서 플레이브의 팬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들은 것이다. 무례한 발언에 사과를 하고 넘어간 그녀의 태도에 왈가왈부하기 전에, 김신영이 보인 반응은 탐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원문을 살펴보면 그녀는 플레이브를 가리켜 '현타'가 올 것 같다고 표현한다. '안 보이는데 어딜 보냐고'라고 말한 것에서 그녀는 보이지 않은 존재, 그렇지만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존재와 방송을 같이 진행하는 것에 어려움을 토로한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김신영의 주장에 상당히 공감할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실제하는 것처럼 간주하고, 이들과 같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19세기나 20세기 관점에서 바라보면 광인의 행동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7살 꼬마가 '상상 친구'를 만들어서 부모님에게 소개했을 때, 부모님이 상상친구와 어떻게 소통해야 할 지 고민하는 꼴이다.


7살 꼬마의 상상친구는 일시적이기에 부모 입장에서는 큰 고민거리가 아니지만, 거대한 팬덤을 몰고 다니고 팬들 입장에서 '실제 존재하는 아이돌'인 플레이브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거대한 존재론적 아이러니를 해결해야 할 과제가 주어진 셈이다. 팬들에게는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라깡이 얘기한 상징계 차원에서, 팬들에게 플레이브는 엄연히 존재하는 이들이다. 눈에 보이고, 팬들과 소통하며, 울고 웃는 존재다. 일례로 플레이브의 소속사인 VLAST는 팬들이 실제 플레이브 멤버를 체험할 수 있게 기술적인 장치를 동원한다. 팬 싸인회에서 이들과 실제로 맞닿을 수 있게 디스플레이를 준비하기도 하고, 콘서트에서는 화려한 이펙트를 동원해 이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등, '리얼'한 환상을 제공하면서 이들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반면, 팬이 아닌 입장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입장은 두 가지 층위로 구분할 수 있다. 한 가지 층위는 '놀이'의 개념으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 버추얼 아이돌인 플레이브는 껍데기라 할 수 있는 아바타(Avatar)가 있고, 그 안에 실제 사람이 있다. 사람의 정체는 비밀로, 아스테룸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자체 '설정'을 지키기 위해 실제 정체는 '흐린 눈'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펭수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펭수라는 캐릭터 안에 분명히 실제 사람이 있고, 인형탈을 쓴 인간이 펭수 설정에 맞춰 연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코스프레'라는 관점에서 플레이브를 보는 것이다.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캐릭터지만 캐릭터가 아닌 이들의 아이돌 활동은 철저하게 코스프레나 부캐의 감각으로 이해된다. 실제로는 진짜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진짜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이들 버추얼 아이돌을 지각하는 것이다. 너와 내가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상황. 이런 관점에서 이들에게 플레이브는 진짜와 가짜가 겹쳐 있는, 양자 역학적으로 '중첩'된 상태다.


다른 층위는 '가짜'로 대하는 것. 이들의 행동을 '정신 나간 짓'이나 '광인'의 행동으로 분류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진짜가 아닌 이들이 진짜인 양 행동하는 것. 우리는 이런 이들을 조현병을 앓고 있는 환자로 대한다. 따지고 보면 '아스테룸에서 온 외계인'으로 이야기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이들을 왜 조현병을 앓고 있는 환자로 대하지 못하는 것인가? 카메라와 스태프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기에 이들은 환자 취급하지 않고 다른 취급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김신영이 보인 태도나, 일반적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들은 광인 그 자체일 것이다. 라깡식으로 표현하자면 상상계에 머물면서, 유아적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인 것이다. 이런 이들은 치료의 대상이지 팬들이 보이는 것처럼 떠받들어야 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장황하게 표현했지만 결국 질문은 한 줄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플레이브는 실재하는가? 아니면 실재하지 않는가? 만약 라깡이 이들 플레이브를 본다면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을까? 아니면 실재계(le Réel)를 엿볼 수 있는, 상징계 차원의 실존하는 인물로 봤을까? 책을 읽고 생각해봤을 때 개인적으로 라깡은 플레이브를 봤다면 웃어 넘겼을 것이다. 상상계 차원에 머물고 있는 유아적 사고에 머문 개인들의 집합이라고 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앞선 질문으로 들어가 내 관점에서 플레이브의 실존성에 대해 답하자면, 플레이브는 분명히 실존하고 실재계까지 볼 수 있는 창구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폭력, 독재와 계엄 등 현실에서 마주하는 여러 구조와 정체성들은 기호를 토대로 삼아 존재양식을 확장한다. 플레이브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실재하는 존재다. 빌보드에 순위를 올리고, 팬들의 환호를 받는 아이돌. 실제 사람들과 소통하면서(물론 여러 도움을 받긴 하지만) 변화하는 존재다. 그런 존재를 단순히 '없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보면서 불안과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를 보면서 세계 멸망과 맞닿아 있는 우울과 죽음의 실체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듯이 플레이브를 통해 우리는 완벽한 '아이돌'이라는 관념에 대해 환희와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적절한 예시는 아니긴 하다. 라깡에서 실재계는 결여(the lack)와 불가능성(impossibility)을 담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아이돌'은 결여와 불가능성을 담지한 개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이상형(IDOL)이라는 시각이 실제 세계에서 불가능하지만 가상-현재의 복합체로 존재하는 플레이브에게는 열려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좀 더 설명하자면, 누구에게나 완벽한 이상형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두에게 완벽한 이상형(IDOL)은 언어를 넘어선다. 직접 경험할 수도 없는 형태이며 현실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플레이브로 대변되는 가상 아이돌은 이를 실현할 수 있다. 아바타(Avatar)로 우리에게 모습을 보여주는 플레이브 개개인은 아바타를 바꾸면서 자신의 외형을 바꿀 수 있다. 개개인에 맞는 외형을 맞출 수 있다. 그럼에도 플레이브 아이돌은 바뀌지 않는다. 껍데기는 바뀌더라도 알맹이는 여전히 그대로인 상태. 그렇기에 이들은 하나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지만 욕망하는 대상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 그런 불가능성과 이해 영역 너머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기에, 가상-현실 복합체의 플레이브를 통해 사람들은 실재계의 그림자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존재란 이처럼 어렵고, 어두우면서 동시에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존재와 존재 너머의 실재계는 항상 거대한 입을 열고 인간을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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