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잰니 Apr 07. 2024

생존자들에게 보내는 위로

뮤지컬 <디어 에반 헨슨>을 보고 

순식간에 찾아온 암전 뒤. 무대를 가득 채운 나무가 나타났다. 3층에서 보는 것임에도 거대하게 느껴지는 나무. 매너 있는 관객들이라 소리내진 않았지만 느낄 있었다. 모두가 나무에 압도되었다는 것을. 뺨에 말라있는 눈물 자국 위로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뮤지컬 <디어 에반 헨슨>은 지난 3월 말부터 대중에 선보여지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최초로 공연되고 있다. 2015년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선보여 크게 성공한 후, 뮤지컬 오리지널 캐스트를 섭외해 영화도 제작되었는데, 넷플릭스에 공개되었으나 큰 인기는 끌지 못했다.


인기와는 무관하게, 나는 영화가 좋았다. 특히 배우 '벤 플랫'의 목소리를 좋아해서, 고등학생을 맡기에는 다소 조숙해 보이는 외모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특히 그 첫 넘버. 'Waving Through A Window'를 듣자마자 소위 '입틀막'을 할 정도였기 때문에. 그 넘버를 실연으로 들을 수 있다면! 한국에 초연된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의 망설임 없이 오프닝 위크로 예매했다.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서술하자면, <디어 에반 헨슨>은 고등학생 '에반'의 이야기다. 에반은 친구들과 얘기할 때 말을 더듬거나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지는 소년이다. 일이 바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으며, 테라피스트에게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는 과제를 받았다. 그 편지로 인해 동급생 '코너'의 자살에 휘말리게 된다.


영화와 뮤지컬이 거의 유사해서 특별한 감상 없이 1부를 보았다. 마지막 넘버 'You Will Be Found'가 나오기 전까지는. 영화에서는 '우리가 당신을 찾을게요'라고 직역한 자막이 나왔다. 목숨을 잃은 '코너'에게 어떠한 사연이 있는지는 나오지도 않고, 그 사건을 이용해 '에반'이 소위 '핵인싸'가 되어버린 상황에 그런 구호가 무슨 소용이람. 와닿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는 냉소도 함께였다. 영화 전반에 대한 감상도 비슷했다. '그래서? 코너는 왜 죽었는데?', '그렇게 그냥 끝이야?'


[디어 에반 핸슨] 첫공 기념! 시츠프로브 ��� ���� �� ����� 영상

https://youtu.be/VYUGTLLQ_U8?si=HIhQPpW2upbcl0uP


뮤지컬은 달랐다. 'You Will Be Found'를 '잊지 않을게'로 의역했다. 온몸이 터질 듯이, 반복해서 잊지 않겠다고 모두가 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잊지 않겠다는 말은 확실한 구호였다. 이미 대상을 잃었다는 인지가 있고, 이후 행동에 대한 연대적 다짐이다. 특히 한국에서, 고등학생들이 친구를 떠올리며 '잊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건 차원이 다른 반응을 끌어낼 수밖에 없다.


1부가 이러한 감각으로 끝나니, 스토리라인 상 비교적 힘이 빠지는 2부도 달리 보였다. 이제 초점은 완전히 사건 이전의 에반으로 옮겨간다. 에반은 코너 식구들의 빈 조각으로 들어가 서로를 위로한다. 그 과정에서 에반의 원래 조각, 어머니가 상처를 받지만 상처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고 에반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어머니가 알게 된다. 


"다음번에 이사 트럭이 오면 엄마도 사라지나요?"

집 나간 아버지가 남긴 상흔이 두 사람에게 여전히 치료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 에반이 그 모든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은 사실, 해프닝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자살 생존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에반은 코너와 전혀 친분이 없었지만, 둘은 똑같은 시도를 했다. 그저 결과만 달랐을 뿐이다. 그래서 에반의 일기에 가까운 편지가 코너의 유서로서 작용할 수 있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동급생 외의 어떤 의미도 없는 관계였지만, 코너의 절친이었다고 모두를 속일 수 있었던 건, 에반이 코너로서 하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는 결국 에반이 실패한 코너였기 때문이라는 걸. 에반의 팔 깁스에 적힌 코너의 이름이 그를 암시하는 듯도 하다.



사건에 휘말리지 않은 에반을 상상해 본다. 에반은 두 번째 나무에 오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쓰는 편지가 효험을 나타내어 세상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까? 확실한 건 자살 유가족인 코너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는지 목도하고, 또 그들과 함께 정다운 저녁시간을 보내고, 코너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대중의 따뜻한 연대를 확인하고, 이윽고 어머니에게 진정한 자신, 즉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나'를 드러내는 일련의 과정이 에반을 나무 위가 아닌, 나무 밑 벤치에 데려다 놓았다는 것이다.


더 이상 코너의 사인이 궁금하지 않았다. 우리는 코너를 이미 잃었고, 사인을 파헤치겠다고 우리가 지키지 못한 그의 개인사와 감정을 들추어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또 다른 코너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에반을 지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코너 프로젝트(모금 행사)로 다시 개장한 수목원에서 코너의 여동생 조이와 에반은 다시 조우한다. 헤어지기 전, 에반은 조이에게 묻는다.


"왜 여기서 만나자고 한 거야?"

"네가 봤으면 해서."


조이는 에반이 사과나무를 보길 바랐을까? 무대를 가득 채운 그 거대한 나무를? 사실 조이가 에반이 봤으면 하는 것, 뮤지컬을 보러 온 관객이 마지막으로 품고 갔으면 한 것은, 코너이자 에반에게 보낸 사람들의 응원과 위로 아니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기다릴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