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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피늄 Apr 24. 2020

시의 쓸모를 생각한다

창작과 비평 <작가조명> 리뷰




나는 평론가의 글이 늘 어렵기만 하다.

단어에서 오는 피로감이 상당하다. 술술 읽다가도 생소한 단어를 만나는 순간, 갑자기 지면은 까다로운 국어 시험지로 돌변해버린다.


한편으로는 궁금하다. 쉬운 표현도 있는데 굳이 이 단어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평론’이라는 묵직한 분위기가 단어에도 고스란히 담겨야만 하는 걸까?


창작과 비평 봄호 <작가조명>에는 황인찬 시인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오연경 문학평론가의 글이 실려있다. 내겐 두 배로 어려운 글이다. 평론가의 글도 어려운데, 매번 아리송한 기분으로 읽는 시를 대상으로 하다니.


그래도 시가 주는 기쁨만큼은 잘 알고 있기에 시의 세계를 탐구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시의 세계도 세상의 변화에 맞춰 형태가 달라지고 있다. 그리고 <작가조명>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내용도 ‘미래파’였다.


‘미래파’는 2005년 처음 등장한 문학 용어이다.

이전의 시 쓰기와는 달리 다소 낯설고 난해한 어법이 특징이며, ‘소통이 어려운 말장난’이라는 비판도 있었다고 한다.



p.296

황인찬의 등장은 소위 ‘포스트 미래파’의 한 가능성을 열었다는 비평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시를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문학적•문화적 현상에서도 하나의 분기점으로 호명되었다.

그의 시는 읽고 바로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독자들에게 환영받을 수 있는 것일까? 현대시사에서 난해함은 곧 소통 불능을 의미했다. 이상이나 김수영이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받은 비난의 키워드가 바로 난해함이었다.

그런데 황인찬의 시는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난해함에 연루되지만, 그것에 곧바로 따라붙는 소통 불능이라는 비난에서는 자유롭다.

그의 시는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



미래파 시인은 ‘소통 불능’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는 자유롭다.


이것에 관한 황인찬 시인의 생각과 고뇌가 인상 깊었다. 장르에 상관없이 일단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 같은 그의 솔직 담백함이 좋았다.




p.291

잘 쓰려면 결정을 해야 한다.
아닌가 싶어도 어쨌든 선택을 해야 하고 유예를 남기더라도 방향을 정해야 한다. 시간이 좀 지나면서 ‘잘 써야 한다’라는 생각이 뒤로 밀려나니까 그런 괴로움이 조금 줄었다.

고민하면 고민하는 대로, 이렇게 봤다 저렇게 봤다 하는 걸 그냥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295

시인에게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중요하고 나 역시 ‘무엇을’과 ‘어떻게’를 고민하는데, 쓰기의 어떤 순간에 이르면 자기회의 같은 것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자기회의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쓰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일이다.



p.298

텍스트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콘텍스트를 충분히 다 짚어줄 수 있는 독자를 생각하고 쓰지만, 동시에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한 겹을 위에 더해서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둘 중에 뭘 더 중시하거나 고려한다기보다는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은 저것대로 기능을 해서 어떤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쓴다.




<작가조명>을 계기로 황인찬의 시집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그가 말하는 ‘한 겹’이라는 구조가 무엇인지 실감이 났다.


하지만 잘 읽히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그의 시는 여전히 어렵다.


그럼에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난해함과 편안함 사이에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비워두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너를 다시 볼 수 있어서 참 좋다”
네가 말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앞에 펼쳐진 밤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을 지켜보던 두 사람이 구분되지 않고,

너를 생각하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해변의 발자국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푸른 밤 속으로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 수록된
‘너의 살은 푸르고’ 부분






이번 창작과 비평 리뷰에는 ‘내가 직접 황인찬 시인을 인터뷰한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 세 가지’를 포함해야 하는 미션이 있다.


그 세 가지 질문을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첫 번째 질문.

시를 읽으면 얻게 되는 어떤 효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독자들이 당신의 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얻었으면 하는가?


두 번째 질문.

요즘 ‘이게 시인가, 에세이인가’라는 고민을 한다고 했다. 고민하는 김에 진짜 에세이를 써 볼 의향이 있는지. (있다면 출간되자마자 바로 사러 갈 것임)


세 번째 질문.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본인만의 무언가가 있는가.

혹은 본인만의 글쓰기 루틴이 있는지.



평론가와 시인의 만남은 쉽지 않은 내용이었고 분량이었지만 그만큼 시를 깊게 들여다볼 수 있어서 유익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나의 생각도 확장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평소 시인은 어떤 생각을 하며 시를 쓰는지 항상 궁금했었는데, 해소가 되어 개운하다.


“대표적 보존식”인 과일잼 같은 시가 내게 와서 어떤 ‘쓸모’가 되어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의 시를 다시 되뇌어본다.




 과일 상자에 남은 과일들은 이미 다 말라버렸습니다 지금쯤이면 그가 씻고 나와 뒤에서 안아주어야 하는데

앞으로 문은 십 년 동안 열리지 않습니다

뒤로는 산처럼 쌓여있는 잼통들......

잼은 대표적 보존식이라 오래도록 먹을 수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 중에서
‘깨물면 과즙이 흐르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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