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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Nov 16. 2020

그냥 파트너예요. 사귀는거 아니구요...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죄책감에 빠지지마. 괜찮아. 이미 지난일이야.

ㅣ저 아이를 붙잡아야 한다.ㅣ


“선생님... 사후피임약을 먹었는데 배가 너무 아프고 피가 많이 나와요…”  

작고 여리게 생긴 창백한 얼굴의 여학생은 보건실에 있던 다른 친구들의 눈치를 보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인문계 상위권 학교라 나름 착실한 학생들이 모여있어 학교폭력이나 성 문제 등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 평화로운 학교다. 그런데 사후피임약이라니! 보건실에 다른 아이들이 많았기에 나의 놀란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태연한 듯 대답을 했다.

“어 그렇구나. 몇 학년 몇 반 누구지?”

여학생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어 방황을 하고 있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아니고 친구 얘기였어요.” 

다른 사람 얘기라며 내 얘기가 절대 아니라는 듯 강하게 손사래를 치며 여학생은 황급히 보건실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순간 실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만회하려면 이 아이를 붙잡아야 한다. 당황하는 여학생을 살려주려는 듯 때 마침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작고 여린 여학생은 보건실 문을 열어젖힌다.

“친구야. 잠깐만! 선생님이 핫팩 데워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그 친구 좀 갖다 줘” 

“아.. 종.. 종 쳤는데... 저 올라가 봐야 하는데요.”

그 배 아픈 친구가 바로 저라고 창백한 얼굴에 버젓이 쓰여 있는데도 허둥지둥 빠져나가려는 여학생을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지금 저 학생을 놓치면 나중에는 더 큰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선생님이 확인증 써 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금방 데워져. “

복잡해진 머릿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전자레인지에 핫팩을 서둘러 넣으며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 사이 다른 학생들은 모두 교실로 올라가고 작고 여린 여학생만 초조하게 전자레인지를 바라보고 있다.  




ㅣ사귀는거 아니예요ㅣ


“친구야 너는 처음 보는데 신입생이니?”

“네”

“참 예쁘게 생겼네. 너 이름이 뭐야?”

“고지혜…. 요”

“음 지혜! 아이고~~ 이름도 너무 이쁘네. 그런데 지혜야 너 얼굴빛이 너무 안 좋아 보여. 핫팩 데워지는 동안 선생님이 너 혈압 한 번만 재줄께.”

당황하는 지혜의 정신을 빼놓듯 안정실 침대에 재빨리 눕히고 혈압계에 공기를 열심히 채워 넣었다. 지혜는 누워 있으면서도 배가 아픈지 다리를 쭉 뻗지 못하고, 온몸이 경직되어 있다. 

“지혜야. 다행히 혈압은 정상이네. 그런데 너 혹시 배가 많이 아프니? 다리를 쭉 뻗지도 못하네.”

“………”

“아픈 곳 한번만 짚어볼래?”

“……”

지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배가 많이 아팠는지 아랫배 쪽을 슬며시 가리켰다. 보건 일지에 적지 않겠다는 다짐을 듣더니, 3일 전에 남사친과 성관계를 했고, 2시간 이내에 내과에 가서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아먹었다고 실토하기 시작한다. 사후피임약은 지난번에도 몇 번 먹었었는데 울렁거리지도 않았고, 배도 하나도 안 아팠는데 이번에는 너무 아프고 피도 많이 나온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눈을 바라본다. 지혜는 이제 갓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이제 열일곱 살 밖에 안된 이 작고 여린 아이가 어쩌다가 사후피임약을 습관처럼 먹게 되었을까? 열일곱이라면... 내 아들과 같은 나이인데.  

“남사친? 남자 친구가 아니고”

“네..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예요. 걔랑 저는 그냥 파트너예요.”

“파트너?”

“그런 게 있어요. 사귀는 건 아니고요”

“아…....”

예쁘고 단정해 보이는 17살 지혜의 입에서 그런 것 도 모르냐는 듯한 말투의 ‘ 파트너’라는 단어를 듣고 있으니 멍 해진다. 요즘 애들은 원래 그런가? 내가 시대에 뒤 떨어지나? 다들 파트너가 한둘씩은 있는 건가?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올랐지만 아픈 증상에 집중하기 위해 더 이상 그 부분은 묻지 않았다.

“피도 나온다고 했지? 생리할 때는 안됐니? 언제가 예정이지?”

“2주 뒤예요”

하... 2주 뒤에 생리라면 그 파트너라는 아이와 성관계를 했을 때는 배란일이었다. 사후피임약을 벌써 몇 번이나 먹어봤을 정도라면 자신의 배란일 정도는 알고 있었어야지…

“지혜야.  그럼 네가 성관계를 했을 때는 배란일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지혜는 배란일이었을 거라는 걸 짐작도 못했던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침대 끄트머리로 옮겨 앉으며 손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 어떡해요? 그럼 그 피가 착상혈인 거예요?”

“그런데 왜 콘돔을 안 했니?” 

책망하긴 싫었지만, 착상혈을 알 정도로 성에 관해 해박한 아이가 배란일에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이 덜컥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에 화가 올라왔다.

“걔가 콘돔 하는 걸 싫어해요. 그냥 안에다 해버리고 저보고 약 먹으래요”

“나쁜 새끼네”

나도 모르게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지혜는 임신 가능성이 있었다. 덜덜덜 떨며 ‘저 어떡해요’를 연발하는 지혜의 모습은, 주인 잃은 강아지 같았다. 작고 여린 그 아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90%는 사후피임약에 의한 부정출혈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임신에 대한 적은 가능성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된다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지금은 이렇게 떨고 겁내고 있지만 병원 가서 임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만 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안심도 심어주었다. 나의 손을 꼭 잡은 지혜는 조금씩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작디작은 그 손을 거리낌 없이 잡아주는 어른이 없었던 걸까?  그 존재만으로도 눈부신 나이의 소녀는 왜 이런 당황스러운 상황에 빠져버린 것일까?



ㅣ저 이제 어떡해요?ㅣ

“선생님... 저는 제가 걸레 같아요”

17살, 이제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소녀는 스스로를 걸레 취급한다. 이런 지혜의 생각은 다른 이로 하여금 그녀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걸레 취급하는 아이를 그 누가 귀한 도자기 대하듯 소중히 대했을까?  딱 그녀의 생각만큼, 또는 그보다 훨씬 하찮게 대했을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막 피어난 아름다운 꽃봉오리처럼 그녀를 소중히 아껴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지금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동물 같은 본능으로 파트너라고 불리는 그 남사친들은 지혜의 낮은 자존감 냄새를 맡곤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어, 예쁘다는 말과 각종 사탕발림으로 지혜를 더욱더 망가뜨렸을 것이다. 

“지혜는 정말 현명한 사람이야. 사후피임약도 먹을 줄 알고 이렇게 힘든 일이 생겼을 땐 도움을 청할 줄도 알잖니. 그런 걸 못해서 미혼모도 생기고 하는 거야. 그런데 너는 어떠니? 다른 데 안 가고 선생님 찾아왔잖니. 정말로 잘 한 거고, 이런 현명한 행동 하나하나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야. 평소에 지혜가 갖고 있는 바른 판단력 때문에 나오는 거야. 그런데 자꾸 걸레 같다느니 그런 생각하면 수치심만 들고 스스로가 점점 하찮게 느껴지기만 해. 너희들 나이가 한참 호기심이 많을 나이기도 하고 또 성적인 부분은 식욕만큼 어쩌면 식욕보다도 강력한 욕구잖니.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그 순간 잠깐 판단을 잘못하고 너 기분에 따랐을 뿐이야. 다시 같은 실수만 하지 않으면 돼. 하지만 단 한 가지 네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니 몸을 아끼지 않은거, 보호하지 않은 것 그것 하나야.” 

틈이 날때마다 스스로를 책망하며 혹시라도 임신이 되었을까 노심초사했을 지혜를 나무라지 않았다. 지금 가장 놀랄사람은 바로 지혜일테니까.

"선생님은 지혜를 혼내고 싶지는 않아.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어. 그런데 지혜가 지금 이기분을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를 스스로 혼내는 마음. 불안한 마음. 너 혼자 걱정하도록 지혜를 내팽개친 그 나쁜놈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말이야. 잘 기억해야해. 니가 그 마음을 잊지만 않는다면 다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꺼야."

긴장한 탓에 잔뜩 웅크려 가느다랗게 떨고 있는 지혜의 등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괜찮아. 지난일이야. 다시 그러지 않으면 돼. 정말 아무일도 아니야. 제발 너 스스로를 무너뜨리지만 말라는 주문을 담아 지혜의 눈물이 멈출때 까지 쓰다듬고 쓰다듬었다.  




ㅣ괜찮아. 자책하지마. 누구나 실수할 수 있어ㅣ

나는 지혜가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생을 살게 되길 바란다. 예쁜 여대생이 되고, 남자 친구와 설레는 첫 키스도, 첫 여행도 가게 되기를 바란다. 가끔은 실연의 아픔으로 성숙의 눈물도 흘리게 되길 바란다. 한때의 행동으로 낮은 자존감과 죄책감에 빠져 눈물과 한탄이 범벅된 삶을 살게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 암울한 시간들은 점점 더 짙어지고 때로는 암흑 같아서 당장이라도 삼켜버릴 것처럼 무섭게 온 세상을 뒤덮어버린다.  하지만 지혜가 스스로 찾으려고 하면 어둠을 거둬 내버리는 빛은 반드시 비춰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길 바란다.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면 조금씩 자존감이 회복되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지혜를 대하는 태도를 결정짓게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그 귀한 태도들이 다시 스스로를 믿게 하는 선순환 낳고, 그 당연한 결과로 작은 성취들이 조금씩 조금씩 따라오기도 할 것이다. 그러는 중에 천천히 가치 있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의 빛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꽃봉오리 같은 17살 지혜도, 또 소중한 우리의 아이들도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심연의 소중한 빛을 발견하고 활짝 웃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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