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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Nov 18. 2020

복분자를 마셨어요. 어지러워요.

초등학생들이 복분자주를 마셨다고? 그것도 학교에서? 오 마이 갓!!


ㅣ술을 마셨어요.ㅣ  

  보건실 문이 천천히 열린다. 무언가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이 공존하는 두 명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빛의 속도에 가까운 날카로운 눈빛으로 온몸을 스캔한다. 약간 상기된 얼굴임, 얼굴 표정도 찡그림 없음. 고통의 신음 소리 없음. 잘 걸어 들어옴. 특별히 눈에 띄는 외상 없음. 다행히 응급은 아닌 걸 확인한 내 손놀림과 말투에선 여유가 묻어난다. 


“어디 아파서 왔니?”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보건실 단골손님들이다. 만약 보건실 방문할 때마다 쿠폰을 주고 제일 많이 모은 사람에게 대일밴드를 상품으로 줬다면 이 두 녀석들은 분명히 대일밴드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타 학교에서 이동하여 이 둘의 존재에 대해 인지 하지 못했던 때는 투약, 찜질팩, 보건실 휴식으로도 좋아지지 않던 심한 복통으로 안절부절못하며 119를 불러야 하나 고민도 했었다. 걱정스럽게 학부모와 통화를 하고 조퇴를 시켰던 초년병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매일 특별히 아픈 곳 없이 보건실을 드나들며 이런저런 증상들로 단 몇 분 만이라도 수업을 빼먹고 싶어 하는 이 두 단골손님에게 이젠 속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도 상도가 있으니 언제 어디서든 교사 신분을 잊지 않기 위해 그들의 마음에 일단은 공감의 체스츄어를 보낸다. "요놈들 맨날 꾀병이야"라고 절대 면박 주지 않는다. 


민망함을 주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만일 면박을 주는 날에는 채워지지 않은 어떤 욕구로 인해 분명히 다시 오기 때문이다. 무언가 본인들이 원하는 루틴이 있는데 그 루틴에 부합하지 않으면 아프다고 생각이 드는 괴상한 질환을 앓고 있는 것 같다. 전국의 보건실 기록을 뒤져 보면 이 괴상한 질환을 앓고 있는 학생들이 적어도 한 학급에 한 두 명은 있을 것이다. 어느 학교에나 있는 걸로 미루어 보아 역병일 수도 있다. 역학조사가 시급하다. 

“어~ 오늘도 배가 아프구나. 큰일이네. 얼른 나아야 할 텐데 그렇지? ”

듣는지 마는지도 관심 없는 영혼 없는 보건실 루틴의 공감의 언어를 중얼거리며 최대한 사무적인 태도로 진료를 하고 따뜻한 물 한 컵 처방과 가끔 유산균이나 비타민 처방을 내려주면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가 하루 동안은 오지 않는다. 보건실 10년 동안 의료지식의 향상보다는 입만 놀리는 사기력만 상승한 것 같다. 


"어디가 아파서 왔을까? 오늘도 배가 아프니?" 

여느 때와 같이 제대로 듣지도 않고, 영혼 없는 대화를 중얼거리며 따뜻한 물 한 컵 처방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술을 마셨어요." 

내가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하다. 

“물?”

“아니오. 술이요 술. 쫌 전에 술을 마셨어요”



ㅣ복분자주를 마셨더니 머리가 너무 아파요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덩치는 나만큼 크지만 분명히 사회적으로는 5학년 어린이인 이 꼬꼬마 녀석들의 입에서 ‘술’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집에서 몰래 훔쳐 먹은 것도 아니고, 백주 대낮에 그것도 학교라는 곳에서. 하... 세상이 많이 변한 것인가? 내가 뒤 쳐진 것인가? 왜 하필 학교에서 술을 먹었지? 


그 순간 며칠 전에 유튜브 영상을 찍겠다며 보건실에서 대여하는 아이스 겔을 터트려 먹으며 기상천 회한 먹방을 찍고 있는 6학년 유투버 녀석들이 번뜩 떠올랐다. 친구들의 제보를 받고, 그 빼박 유튜브 주소를 확보하여 담임교사에게 넘긴 뒤 눈물 콧물 쭉 빼도록 기나긴 반성문을 받았던 사건이 떠올랐다. 분명했다. 이 자식들도 유투버일 것이다. 집에서는 엄마한테 들키니 간 크게 학교에서 술을 마셨고, 그 모습을 호기롭게 촬영까지 해서 업로드 한 뒤, 조회수를 팍팍 늘려 “좋아요! 구독! 잊지 마세요”를 외쳤을 것이 분명하다. 이 자식들 순진하게 봤는데 알고 보니 발랑 까진 것 들이었다. 어디서 못된 짓만 배워와서는 학교에서 술을 쳐 먹고 그것도 자랑스럽게 보건실에 와서 떠들고 있단 말인가.


"뭐? 술? 술이라고 했어 지금?"

"네. 술 이요. “

똑같은 질문을 계속해대는 내가 답답하다는 듯 ‘술’이라는 단어에 특별히 악센트를 줘가며 대답한다. 일단 화를 내지는 않으려고 애를 썼다.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술을 마셨다는 사실이 대내외 적으로 공개가 된다면 결코 조용히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최대한 진실한 진술을 확보하기 위해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묻기 시작했다. 

"술이 어디서 났어?"

"김열매(가명)가 복분자주를 갖고 와서 먹어보라 그래서 한잔 먹었는데 머리가 너무 아파요"

갑자기 다급해진다. 재차 확인해도 김열매가 가져온 복분자주를 두 어린이가 사이 좋게 나눠 마셨고 그것으로 인해 머리가 아픈 게 확실하단다. 



ㅣ나에게도 일탈이 있었긴 하지만.. 그래도 초등학생이 술은 너무 하잖아!ㅣ


나는 고1 때 처음 수학여행에서 소주를 마셔봤다. 선생님이 이끄는 대열에서 이탈해 해운대 포장마차로 슬쩍 가 소주 몇 병을 구입 한 뒤 친구들과 한 병씩 교복에 숨겨 그 밤을 불태웠다. 첫 소주에 얼큰하게 취한 친구 한 명이 대성통곡을 하지만 않았더라도 나의 첫 소주는 달콤하게 추억으로 남았겠지만, 술 먹으면 수도꼭지가 된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한 친구 덕분에 그 밤 내내 기합을 받아야 했던 학창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초등학생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 그것도 수학여행 때 했던 일탈을 5학년 짜리가 한다고? 심지어 학교에서 술을 마셨다고? 다급히 교실로 전화를 하니 전담시간이라 담임교사가 없다. 전담교사도 황당하다며 아이들에게 술을 마셨다는 얘기를 듣고 기가 막혔다고 한다. 일단 머리가 너무 아프다기에 보건실로 보냈으며, 위에서 담임교사가 진상조사 중이라는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확인했다.


믿기 싫지만 두 아이의 음주는 사실이었다. 두 어린이를 침대에 눕히며 마지막 한 줌의 의심, 아니 희망으로 눈치채지 못하게 재빠르게 다시 한번 스캔을 했다. 이번엔 얼굴 표정에 집중한다. 다른 곳은 이제 중요도가 낮다. 아뿔싸! 웃음기가 전혀 없다. 이건 진지하다는 반증이다. 진지한 표정을 넘어 걱정과 불안까지 공존해 보인다. 



ㅣ숙취를 호소하는 두 꼬맹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일단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하니 약을 좀 먹여야 하나? 괜히 투약을 했다가 오히려 더 아파지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궁리 끝에 일단 진상조사를 기다리며 알코올의 농도를 낮춰야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큰 컵에 시원한 물을 한 가득씩 따라 두 술주정뱅이들에게 들이밀었다.

“이게 뭐예요?”

“물이야 물. 술에는 알코올이 있어. 그게 흡수되면 머리가 많이 아파. 물을 마시면 알코올 농도가 낮아지니까 좀 덜 아플 수 있어.”

뭔 소리인지... 내가 술 마실 때 취하지 않기 위해 쓰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쓰고 있다니 기가 막혔지만 숙취 해소에도 차가운 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효과가 있는 법이다. 꾸역꾸역 한 컵을 다 마신 아이들에게 또 한잔 씩을 내밀었다. 

“한잔 더 마셔. 그래야 머리가 안 아파져”

“아.. 배불러요 샘. 못 마시겠어요.”

못 마시겠다고 버티는 아이들에게 술에는 물이 특효약이라는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이거 안 마시면 너 지금은 머리만 아프지만 조금 있으면 울렁거리고 토할 거라는 숙취 경험이 만들어낸 주옥같은 조언으로 또 한잔씩 가득 물을 먹였다. 아이들이 물먹는 하마가 되어 가고 있는 동안 때마침 울리는 전화벨 소리, 반갑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ㅣ이 자식들 혼쭐을 내야겠어!ㅣ

"보건 선생님 저 담임이에요. “

드디어 진상조사가 끝난 모양이다. 진지하게 담임교사의 브리핑을 듣는다.

”아 샘 많이 놀랬죠? 나도 엄청 놀랬는데 이 자식들이 늘 속을 썩이더니 이젠 술이라니 하.. 내가 진짜 선생 못 해 먹겠어 “

추임새가 너무 많다. 빨리 본론부터 말을 하지 늘 서론이 너무 긴 사람이다. 

”네 맞아요. 그런데 결과를 좀 빨리.. “ 

”아 맞네 맞네. 미안 미안. 허허허 다행히 술이 아니고 복분자 음료수네요. 아 놀래라. 혹시 몰라서 내가 막 마셔봤잖아. 맛있어 달아. 복분자 효소 그거 있잖아요. 설탕으로 재 놓고 여름에 얼음물에 타 먹는 거 그거예요. 걔네들 올려 보내 주세요. 상황 종료! 허허허 허"


휴, 다행이다. 그렇지.. 5학년 짜리가 술을 가져와서 마셨을 리가 없지. 그럼 얘네들은 뭐야?

음료수 먹고 왜 아파.  이 자식들 설마 또 수업 땡땡이치려고 거짓말하는 거야?

"얘들아 이리 나와 보세요! 더 안 누워도 되겠어요!" 

엄한 선생님 코스프레에는 존댓말이 기본 옵션이다. 나는 너를 더 이상 친근하게 대할 생각이 없으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훈계를 할 작정이라는 무언의 암시를 내포한다. 물 먹는 하마가 되어 빵빵한 배를 두드리고 있는 술주정뱅이 아니 물 주정뱅이들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왜요? “

왜요? 이 괘씸한 거짓부렁이들을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하지?

"너희들이 마신 건  복분자 음료수라고 하는데 왜 술이라고 거짓말을 했지요?"

"아니에요. 진짜 술이에요."

"뭐예요?? 계속 거짓말을 하네! 지금 담임선생님께서 전화를 해줬고 혹시 몰라서 마셔보기까지 하셨데. 음료수가 맞다고 하는데 왜 계속 거짓말을 하는 거냐고?”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계속 거짓말을 해대고 있는 녀석들의 꿀밤을 한 대씩 때려주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으며, 거침없이 취조를 계속했다. 

“진짜 술 맞아요”

“아니, 너네 담임선생님이 직접 드셔 보셨고, 복분자 음료수라고 하셨다고. 못 들었어? 그런데 왜 끝까지 그게 술이라고 하는 거야?”

계속 거짓말을 해대는 아이들 앞에서 나의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지며 짜증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ㅣ억울한 주정뱅이

"복분자는 술 만들 때 쓰는 거잖아요. 우리 엄마는 복분자술 만들어서 엄청 많이 먹어요. “

억울함이 잔뜩 묻어나는 복분자주에 관한 변론을 듣고 있으니, 아! 불현듯 우리 아들이 생각났다. 4학년 발표 시간에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 “이라는 담임선생님의 질문에 자랑스럽게 번쩍~~ 손을 들어 "맥주요~~~" 했던 일화가 떠올랐다. 우리 아들의 머릿속에 샤워 후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시원하게 맥주 한 캔 씩 따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맥주’로 세뇌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어린이의 어머니도 나처럼 술 좀 드셨나 보다. 복분자로 술을 빚어 맛있게, 많이 드시던 엄마의 모습으로 인해 이 아이들에게 당연히 ‘복분자=술‘이었다.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못 마신다는 속담의 참뜻을 이제 서야 헤아리며 두 물먹는 하마들을 더 이상 취조하지 않고, 오늘은 소변 좀 자주 볼 거야. 물은 몸에 좋은 거니까 건강해질 거라는 덕담을 멋쩍게 건네며 교실로 올려 보냈다.

오늘은 나도 집에 가서 맥주 대신 시원하게 물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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