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만나는 얼굴들이 당연히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순차적 등교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드디어 1학년들도 등교를 했다. 인간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다. 생전 처음 접하는 새로운 바이러스에 노출되지 않으려 다들 답답한 마스크를 쓰고 열심히 각자의 역할들에 충실하니 말이다.
‘똑똑’
조용한 보건실 노크 소리와 함께 키 크고 삐쩍 마른 하얀 얼굴의 신입생이 쓱 들어온다. 한눈에 알아본 그 아이... 병호다. 초등학교 때도 삐쩍 마르고 약해 보여서 '밥 좀 먹어라'는 잔소리를 인사처럼 했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졸업한 지 몇 년째인데 아직도 그렇게 말랐니. 그때도 밀가루 인형처럼 피부가 희였고, 팔뚝이 내 손목만큼 얇았었는데 역시나 아직도 나보다 손목이 얇다. 나는 아이들의 성장기를 거의 고스란히 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가졌다. 기간제 교사로 6년간 근무했던 초등학교 바로 옆의 고등학교로 임용고시 패스 후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특히나 올해 신입생들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6학년 졸업할 때까지 쭉 지켜보았기 때문에 얼굴과 성향을 속속들이 아는 아이들이 무척 많다.
매일매일이 이산가족 상봉이다. 병호 덕분에 오늘도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또 한 번 하게 생겼다.
“병호 구나~”
입학 후 처음 본 보건 샘이 자기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니 어안이 벙벙해하는 녀석이 귀엽다.
“아... 네..( 이 여자가 누구지? 아까 아침에 청소시켰던 샘인가?)”
그 모습이 우스워서 계속 놀려먹고 싶다.
"병호 너 밥 먹었어 안 먹었어? 너 아직도 밥 안 먹고 다니냐? 왜 아직도 이렇게 말랐냐고?"
"네?"
“병호 너 안개초 나왔지? 선생님 생각 안 나? 안개초 보건 선생님이었잖아?”
“아~~ 선생님! 진짜예요? 근데 선생님 기억력 대박이예요. 어떻게 한 번에 알아보세요. 게다가 마스크도 썼는데?”
“얘 얼굴로 알아보니? 너는 몸이 명찰이야! 저기 멀리서도 딱 병호라고 쓰여있구먼 뭘”
유난히 마르고 하얗던 병호는 거의 매일 넘어져서 여기저기 잘 다쳤었는데, 한 번은 크게 잘못 넘어지는 바람에 이마가 쭉 찢어져 병원에서 병호 어머니를 만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근데 오늘은 어디가 아프실까? 너 예전엔 엄청 잘 넘어졌었는데 오늘도 넘어진 것 같지는 않고..”
“저 오늘은 너무 어지럽고 손이 덜덜덜 떨려요. 이거 봐요.”
안색이 너무 창백해 얼른 침대에 눕히고 보니 정말로 양손을 덜덜덜 떨고 있다.
“어머 너 왜 그러니? 혹시 따로 뭐 먹은 거 있니?”
“실은 저 빈속에 핫식스 마셨어요. 오늘 수행이 3개나 있어요. 아... 등교한다고 좋아했는데 별로 배운 것도 없는데 수행평가만 엄청 봐요. 그거 준비하다가 잠도 거의 못 잤는데 아침에 졸려서 하나 더 먹었거든요. 첫 수행이라 잘 봐야 해요”
다행히 바이탈은 괜찮았지만 담임교사를 통해 가정에 알렸다. 흡착제와 물을 많이 먹게 한 후 보건실에서 한 시간 정도 쉬더니 멀쩡해졌다며 싱글싱글 웃으며 돌아갔다.
그 후로 병호는 매일 하교 시간에 보건실에 들렀다.
“너 왜 실없이 맨날 보건실에 오는 거야?”
“보건실이 좋아서요.”
“아이 짜식 봐. 그래 선생님이 좀 예쁘긴 하지만 그렇게 맨날 오면 쓰니?”
“선생님 때문이 아니라 제 여자 친구가 보건실 청소담당이라서 오는 거예요”
머쓱타드가 따로 없다.
"야 너 병호. 너 사회생활 좀 더 배워야겠어! 그래도 쫌 '샘이 예쁘시긴 하지만 여자 친구가 있어서 오는 이유도 있습니다. 허허' 영혼 없이라도 얘기해주면 어디가 덧나니?'
병호는 보건실 청소담당인 여자 친구를 엄호하며 매일매일 보건실을 쓸고 닦는다. 다른 보건실 청소담당 여학생은 그런 병호 커플을 보며 이놈의 세상 더러워서 못살겠다며 ‘커플지옥 솔로천국’을 외치며 보건실 창틀이 닳아 없어지도록 걸레에 분통을 쏟아가며 씩씩 거린다. 바라만 봐도 그 풋풋함과 순수함이 너무나 부러운 고등학생들이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선생님 이제 저희 청소 다 끝났어요!”
“너네 오늘 뭐할 거야? 손 꼭 붙잡고 어디 좋은데 가시나?”
“아무래도 방학식이니까 쫌 놀아야겠죠?”
코로나 19가 선물한 일주일 남짓한 짧은 여름방학이지만 병호 커플은 싱글벙글 좋아 죽겠단다. 하긴 나도 방학이 이렇게 좋은데 니들은 오죽하겠니?
“병호! 너 방학 땐 밥 좀 많이 먹고 살 좀 쪄서 만나는 거야. 알겠어?”
“선생님~ 저 많이 먹어요 선생님. 흐흐흐”
일주일 남짓한 여름방학이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다. 광복절을 계기로 코로나 19가 다시 전국적으로 퍼져 온 나라가 다시 난리통이다.
'딩동.' 문자 알림음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전화와 문자 알레르기가 생겼다. 자가 격리자가 있어요. 확진자와 동선이 겹쳐요. 열이 나요. 인근 회사에 확진자가 나왔데요. 매일매일 코로나와 관련된 전화와 문자로 거의 노이로제 상태다. 이번엔 또 무슨 소식이냐. 지겹다 정말..
'보건 샘. 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문자 드려요. 간밤에 1학년 학생이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어요. 장례식장에는 담임과 학년부장이랑 저만 살짝 다녀올 거예요. '
교장선생님의 문자다. 불안한 느낌에 얼른 전화를 했다.
"어 윤쌤. 이름은 들었는데 까먹었어요. 이동호 선생님 반 남자아이인데. 기립성 저혈압이 있었다지 아마. 여자 친구도 있었다던데. 안쓰러워서 어떡해"
순간 병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 순간 병호가 생각나는지 모르겠지만 그 반에 여자 친구가 있고, 기립성 저혈압이 있던 아이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병호밖에 없다. 제발 아니길.. 어떤 아이도 17살이 죽어선 안 되는 거야. 이제 갓 중학교를 졸업한, 고등학생이 된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은, 친구들과 농구도 해야 하고, 학원도 가야 하고, 여자 친구도 만나야 하고, 대학도 가야 하는데, 해야 할 일 경험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은 17살이 죽는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잖아.
병호는 집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말갛던 그 얼굴, 개학하면 보자던 환한 인사, 여자 친구를 바라보던 다정한 눈빛, 열심히 보건실 복도를 닦던 그 성실한 몸짓을 이제 더는 볼 수가 없다. 병호와 방학맞이 인사를 하던 보건실 복도에서의 그 인사가 마지막이 될 꺼라곤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내일 살아있을까?
오늘 치료한 아이들을 내일은 볼 수 있는 건가? 우리가 매일 만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나? 우리는 어쩌면 단 한순간도 안전하지 않은 삶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몇 초 후의 삶도 자신할 수 없는 이 불안정한 세상에서 단지 살아있을 확률이 더 높다는 이유로 내 주변의 사람들과 나 자신을 하찮게 대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보건실에 오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모르게 지나온 생사의 고비가 얼마나 많았을까? 나도 모르게 지나쳐갔을 사고의 고비들, 아슬아슬 하게 나를 빗겨갔을 범죄의 순간들.. 세상에서 지금껏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축복이고 기적이었어. 그냥 살아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정말 고맙다. 공부 못해도 괜찮고, 잘하는 거 없어도 괜찮고, 말썽 좀 피워도 괜찮아. 그냥 내일 또 잘 살아있기만 해도 넌 큰일을 해내고 있는 거야. 내일 꼭 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