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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 Nov 22. 2020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삼삼삼 커피 타던 미스윤이 지금은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네요.

"미스윤! 이거 복사 좀 해다 줘"
"미스윤! 커피 좀 타 줘요. 삼삼삼 알지?"

삶의 폭이 넓다는 것,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 들을 많이 겪었다는 것, 그래서 많이 슬펐다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아킬레스 건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한때 미스윤이었다. 고등학교 교사와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 호칭이지만 꼬박 2년을 상고 출신의 미스 윤으로 불렸고, 당연히 미스윤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상사의 취향에 맞게 커피를 타고, 신문을 가지런히 놓고, 사무실 탁자를 깨끗이 닦아놓고, 재떨이를 깨끗이 비웠다.




"엄마는 오빠밖에 대학에 보낼 수가 없어.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 형편에 대학을 딸들까지 보낸다는 건 힘들잖니. 그럴 능력이 엄마는 안돼. 그러니 넌 상고를 가도록 해라."

엄마의 당부 같은 선언 이후 나는 중학교 때부터 그냥 그냥 공부했다. 잘할 필요가 없는 공부를 굳이 애써가며 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근육이 단련되어 있었다거나, 조언을 해줄 어른이 있었더라면 내 힘으로 대학도 가고 좋은 직장도 갈 수 있다고 의지를 불태울 수도 있었겠지만 매일매일 끼니 걱정을 하며 하루하루 버텨가는 엄마를 보면 그나마 조금 있던 공부의욕마저도 뚝 떨어졌다. 엄마를 걱정하고 안쓰러워했다면 절대 거짓말이다. 이런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이 원망스러웠고, 아빠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엄마 탓인 양 미워했고, 형편 탓에 학교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엄마가 부끄러웠다. 왜 박복하게도 난 이따위 집에 태어나서 남들 다 가는 대학을 꿈도 못 꾸어야 하는지 미움과 증오와 원망밖에 없었다. 큰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루하루 날이 밝으니 눈을 뜨고, 날이 저무니 잠을 자는 그런 인간이었다. 삶의 희망이라곤 하나도 없는, 죽지 못해 사는 그런 아이로 고등학교 시절과 미스윤 시절을 보냈다.




미스윤이 고등학교 교사가 되기까지 여러 삶의 궤적들이 있어 일일이 설명하기가 어렵고 가끔은 아프기도 하다. 더러워서 그만둔 미스윤 시절, 무작정 수능을 치르고 전문대 간호학과에 입학하고 학점은행으로 학사를 따고 임용고시를 치르고 정규교사가 되었다. 대단하다. 독하다. 끈기가 있다. 역시 하다 보면 되는 거냐. 등등.. 나의 히스토리를 아는 사람들은 가끔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때로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캐묻기도 하지만.. 사실 거창하게 얘기해 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냥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수능 보고 대학 간 것이야 당시에 간호학과가 지금 만큼 그렇게 박 터지게 점수가 높지 않아서 입학할 수 있었고, 학점은행이야 그리 끈기가 필요 없었다. 단 하나 끈기와 공부습관이 필요했던 임용고시에선 같이 스터디했던 좋은 동료 덕분에 공부하는 방법을 많이 배웠다. 그전에 기간제로 지내는 동안 당했던 억울한 여러 일들이 절실함을 만들어주었기에 가능했었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얘기하다 보니 상고 졸업 여직원이 고등학교 교사가 되기까지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 같아서 무안하고 부끄럽다.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  페놀 유출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상고 졸업 여직원들이라는 또 다른 사회적 주제로 풀어냈다. 학력차별, 대기업 횡포, 성차별 등등 풀리지 않은 숙제들을 어쩜 그리도 발랄하게 풀어냈는지 영화를 보는 내내 너무 신선했고 마지막 결말까지도 너무 좋았다. 고아성, 이솜, 박혜수 의 찰떡 케미도 너무 좋았다. 고아성의 후배인 생산 2부의 대리님의 어리숙한 연기도 너무 좋았고, 상무의 미친놈 연기도 좋았고, 사장의 영리한 연기도 좋았다. 상고 출신의 내가 시나리오 작가였다면 분명히 진부하게 이야기를 전개했을 거야. 공부를 잘했지만 가정형편이 안 좋아 상고를 갔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해서 대학을 갔고 그래서 똑똑해져서 회사의 부조리를 바로 잡고.. 등등..

아무나 시나리오를 쓰고 소설을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영화를 보는 내내 했다. 발랄하고 시원하고 통쾌한 영화를 오래간만에 봐서 아주 기분이 좋다.  상고 나온 게 별거니. 숨길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거야. 아주 친한 사람이 아니면 아직도 상고 출신 얘기를 좀처럼 꺼려하는 나에게 그게 뭐 별거냐는, 아니 진짜 멋진 거라는 자신감을  심어준 영화라서 더 좋았다는 건 제일 큰 나의 감상평이다. 고마워요. 배우님들 감독님. 그러게요. 진짜 자랑스러운 거였는데 왜 그렇게 나는 숨기고 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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