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갑지 않은 손님, ‘나의 감기’

비워진 하루

by 사생활치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어떤 날에는 뜬금없는 손님이 찾아오곤 한다. 그 손님은 정말 갑자기 찾아와서 는 날 당황시키고 내가 하고 있던 것들을 전부 손에서 내려놓게 한다. 관자놀이를 눌러보기도 하고 거북이라도 된 듯 고갯짓을 하기도 하지만, 머릿속을 온통 날뛰며 부딪히는 손님은 좀처럼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들어올 때 그랬던 것처럼 나가는 것도 늘 제멋대로인데 보통 반나절은 날 괴롭혀야만 돌아간다. 하지만 그 마저도 그냥 떠나진 않는다. 내 머릿속에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생각들 중 본인이 갖고 싶은 것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덥석 가져가 버리는 굉장히 무례한 손님이다. 그래서 손님이 사라지고 다시 혼자 남는 그 순간이 되면 나는 늘 무엇을 도둑맞았는지 남은 생각들을 추스러본다. 모든 기록을 살펴보아도 무얼 잃었는지 알 수 없는 날의 밤에는 매우 무기력해진다. 잃은 게 없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분명 내가 무언가를 잃은 건 분명하다. 운이 좋다면 끝내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모르고 지나겠지만.




내게 손님이 찾아온 날의 그 하얀 백지 같은 상황을 너무나 많이 경험했기에 중요한 것들은 절대 머리에 기억해두지 않는다. 스마트폰, 수첩, 워크플로위(일종의 온라인 메모장) 등 이중 삼중으로 철저히 기록해둔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있었던 중요한 약속 자리에 나가지 않는다던지 주어진 일을 건드리지도 않는 식은땀 나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모습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미 알고 지켜보는 이들은 늘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오히려 나에겐 일종의 감기 같은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특이한 감기는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에게 처음 찾아왔다.



실내화가 든 신주머니를 붕붕 돌리며 학교를 가고 있는 소년의 이름은 이민영. 그날도 부모님에게 혼이 나서 등교를 하는 민영은 심술 가득한 얼굴을 하고는 애꿎은 신주머니만 어지럽게 돌리고 있었다. 몇 바퀴나 돌렸을까 집에서 5분 거리밖에 안 되는 그의 초등학교에 도착한 민영은 소울메이트 친구들과 놀 생각에 금방 화가 풀렸다. 이미 학교에는 일찍 등교한 같은 반 친구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삼삼오오 교실 바닥에 모여 종이 따먹기를 하는 친구들부터, 공기놀이하는 친구들, 게임보이를 가진 친구와 그 곁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친구들,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서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황금빛 전성기를 맞은 ‘포켓몬스터’ 카드를 자랑하는 친구들까지 다양했다. 그 친구들 중 민영의 단짝은 교실 구석에서 낙서를 하며 놀고 있는 중민과 영준이었다. 민영까지 합세한 그들은 반에서 ‘이중민영준’으로 불리는 하나의 세트메뉴 같은 존재였다. 서로 많이 다른데도 그 다른 점들을 채워주기에 그들에게는 서로가 눈, 코, 입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셋 중 하나라도 빠져있으면 흥이 잘 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세 친구는 늘 붙어 다녔고, 그날도 셋이 같이 쉬는 시간에 정문 앞 문방구로 군것질을 하러 몰래 나왔다.

그 날이었다. 그 날의 사건으로 인해 민영은 기억을 잃기 시작했다. 그때 친구들과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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