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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 정(情), 흥(興)으로 풀다

- 한국 정서로 세계 울린 '폭싹수'

by 방구석 지식in

살면 살아져. 손톱이 자라듯이 매일 밀려드는데 안 잊을 재간이 있나. 제주 해녀인 광례(염혜란)는 딸 애순에게 억척스럽게 말한다. 절대로 물질하지 말라. 식모살이하지 말라. 하루 벌어먹고 살기 힘들지만, 귀가 닳도록 신신당부한다. 광례는 애순에게 하나의 세계였다. 든든한 버팀목이자 그루터기. 언제든지 쉬어갈 수 있고 힘든 세상에 맞서 견딜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든든한 기둥이던 광례는 애순이 10살이 되던 해 눈을 감는다. 숨병(잠수병)이다.


"살다 보면 더 독한 날도 와. 살다가 한 번씩 똑 죽고 싶은 날이 오거든 잠녀 엄마 물질하던 생각 해. 암만 죽겠고 서러워도 잠녀 입에선 그 소리 절대 안 나와. 그 드신 물속에서 죽을 고비 골백번마다 살고 싶은 이유가 골백개더라" 결국 어멍(광례)의 삶을 이끌던 팔 할의 한은 바람처럼 으스러졌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고, 다른 세계가 꽃 피었다. 소녀는 쓴웃음을 삼키며, 어멍(엄마)의 바람처럼 '요망지게(야무지게)' 살아낸다. 때론 잡초처럼 모질게, 때론 민들레처럼 나부끼며, 때론 유채꽃처럼 수수하게 피고 진다. 섬 놈한테 절대 시집가지 않겠다고 부르짖었지만, 인생은 고차방정식이었다. 육지에서 사는 것, 대학에 가는 것, 시인이 되는 것 무엇하나 이루지 못하고 애순은 '팔불출 무쇠' 관식이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인생이 얽히고설켜있다.


매우 수고하셨습니다. '폭싹 속았수다(제주도 방언)'의 뜻이다. 그때 그 시절,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 아니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견뎌낸 우리 부모님의 모습이다. 부모는 모진 바닷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내 자식만큼은 더 먹이고 싶어 했다. 가난의 대물림. 부모와 자식 간 애증의 서사. 광례-애순-금명으로 이어지는 인생 여정. 악착같이 일해도 입안에서는 짠내가 돌았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리얼리즘은 장편소설 삼대처럼 뿌리 깊다. 누군가에게는 그 뻔한 클리셰 범벅이겠지만, 누군가에게 잔잔하게 눈물샘을 자극한 이유다.


폭싹수는 도파민 디톡스로 전 세계를 울렸다. 그도 그럴 것이 폭싹수는 공개 3주 만에 글로벌 비영어권 부문에서 1위를 기록했다. 특히, TV-OTT 종합부문에서 6주 연속으로 1위를 차지했고, 미국의 영화 관련 웹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 99%를 보이며, 역대 한국 드라마 가운데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폭싹수는 한국 현대사, 제주 문화, 그리고 한 가족의 꿈을 한 편의 감동적인 서사로 엮어냈다"라고 미국 타임지는 전했다. 삶이 그대에게 입에 쓴 레몬을 주었다면, 달달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먹으라는 외국 속담처럼 폭싹수의 영어 제목 역시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감귤)>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봉준호 감독의 말이 옳았다.



1. 한(恨)과 정(情) : 부모 가슴에 묻고, 애증으로 사무친 가족愛


한은 다른 어떤 것보다 가장 한국적인 심성 특질로 여겨져 왔다(한민·한성열, 신명에 대한 문화심리학적 고찰, 2007.06). 특히 한국인의 한 정서는 결핍과 불행에서 비롯되었다고 최상진(1991)은 밝힌다. 폭싹수는 지역과 계층, 세대라는 관점에서 한국인의 정서를 극대화시켰다. 아니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담아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애순이 있었다. 바닷바람이 입가에 가시기도 전에 애순은 자식을 가슴에 묻었다. 부모를 찾아 나선 동명(셋째 아들)이가 물에 빠져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것이다. 애순은 얼마나 뭍(육지)으로 떠나고 싶었을까. 제주의 한이다. 시어멍이 금명이(첫째 딸)에게 물질을 시키려 했을 때, 쌍심지를 켜고 역정을 내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뺨을 맞은 투박한 볼이 울그락불그락 부어 있었다.


계층의 사다리 역시 폭싹수를 관통하는 중요한 정서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첫째 금명이가 파혼을 당했을 때, 사기를 당해 둘째 은명이가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부모는 가슴 한편을 쓸어 담았다. 그루터기처럼 애순과 관식(부모)은 배를 팔면서, 집을 팔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애증의 서사는 깊어만 갔다. 제주의 한과 가난의 설움은 어느 순간 부모를 향하고 있었다. 금명은 자신의 말이 부모를 상처 주고 또다시 자신을 찌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처를 후벼 팠다. 나는 돈 없는 아비처럼 살기 싫다. 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하나. 누구를 위해서. 세치의 혀가 부모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묵직하고 매섭게. 가장 연한 살은 그만큼 상처 나기가 쉬웠다.



2. 흥(興)으로 승화 : 호로록 봄부터 펠롱펠롱 겨울까지

"엄마는 나대로 행복했어. 그림 같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다고" 여전히 꽃잎 같고, 여전히 꿈을 꾸는 애순. 당신을 만난 인생은 더없이 행복했다고. 그러는 사이 애순의 머리맡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관식의 얼굴에는 버섯꽃이 피었다. 꽃 같은 봄은 호로록 지나가고, 태연하게 눈을 깜박이듯 겨울은 사뿐사뿐 찾아왔다. 중년이 되어버린 애순과 관식, 푸르름을 간직한 금명이 얼굴을 보이지만, 삶은 퍽퍽한 고구마처럼 목구멍을 에워쌌다. 누구보다 강하던 집안의 대들보 무쇠 관식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한 것이다. 혈액암. 관식의 삶에, 애순의 가정에 청천벽력 같은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숨 가쁜 호흡과 극심한 피로가 도돌이표처럼 이어지며, 반세기 넘게 함께한 순간들이 스쳐간다. 주마등처럼.


하지만 애순은 한 맺힌 응어리를 닫힌 무대가 아닌 열린 무대에서 어르고 삭인다. 애순은 팔 할이 바람이던 인생을 흥(興)으로 승화시켰다. 펜과 종이로 한 글자 한 글자 꾹 꾹 눌러썼다. 당신을 만나 육지에서 사는 것, 대학에 가는 것, 시인이 되는 것 무엇하나 이루지 못했지만, 결국 하나는 해냈다며 눈시울을 붉힌다. 한(恨)이라든가 정(情)과 같은 한국인의 정서 구조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어진 것이다(이재복, 그늘로서의 굿의 형식과 한국 소설의 지평, 2014.12). 신명 나는 굿으로, 살풀이 춤으로, 구슬픈 민요로, 씨줄과 날줄로 응축된 시로 인생을 풀어내는 양식도 다채로웠다.


"엄마는 지금 또 봄이야" "만날 봄이었지" 반세기동안 함께 한 인생이 곧 애순이의 글감이 되었다. 감추고 싶었던, 숨기고 싶었던 추억들을 고구마 줄기 캐듯이 꺼내든다. 웃고 울던 순간들. 인생 사계절. 애순은 겨울 끝에 봄이 온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너무나 어렸고, 여전히 여린 당신의 계절에게 들려주는 한마디. 인생 마지막 겨울에도, 애순의 인생도, 금명의 인생도, 우리의 인생도 폭싹 속았수다.





<참고문헌>

한민·한성열(2007.06). 신명에 대한 문화심리학적 고찰

박현경(2009.11). 한국인의 정서와 에니어그램: 정(情)과 한(恨)의 에니어그램적 측면에서의 조명

이재복(2014.12). 그늘로서의 굿의 형식과 한국 소설의 지평: 황석영의 손님을 중심으로

폭싹 속았수다(2025.05) 나무위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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