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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지식in Sep 21. 2022

그깟 종이 한 장과 명함의 두께


려웠다. 피하고 싶었다. 시나브로 찾아왔던, 그림자가 내면을 뒤덮었다. 느닷없이 찾아온 참사. 299명의 사망. 안산 단원고. 유가족들. 언론에서는 무리한 선체 증축과 운전 미숙을 이유로 침몰 원인을 규정했다. 그 뒤로 쏟아지는 기사들.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다. 그 자리를 껍데기가 채웠다. 나도 그랬다. 이유가 필요했던 거다. 도망칠 출구 말이다. 긴요했다. 그럴듯한 껍데기. 말이 많아질수록 설득력은 떨어진다. 변명을 위한 이유들만 넘친다. 나와 누군가를 설득시킬 논거였다.  


언론은 투쟁의 산물이다. 그럴듯한 이유를 찾았다. 어느 공영방송기자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솔깃했다. 멋있다고 느꼈다. 공영방송 KBS만 진정한 기자라 여겼다. 경제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정치권력에도 목소리를 내는 기자들 말이다. 투쟁의 불씨는 여의도 광장을 뒤덮었고 촛불이 모여 횃불이 됐다. 그렇게 불현듯 찾아온 사춘기에 회사를 떠났다. 사표라 쓰고 출사표라 읽었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는 없었고 타들어 가는 활화산만 있었던 거다. 태양으로 돌진한 이카로스였다. 사춘기였을까. 도피처였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알맹이는 없었다.


진짜였을까. 아니다. 껍데기다. 허영이다. 뭔가 대단할 거란 생각. 현란한 논리와 이성들이 종이 한 장에 담겼다. 회사를 떠날 때 건넨 사직서에 말이다. 세상을 바꾸겠다. 언론은 투쟁의 산물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불필요한 겉치레다. 나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논거는 종이 한 장에 빼곡히 녹아 있었다. 의기양양했다. 원하는 게 뭐냐. 사표를 건네자 되돌아온 말이다. 공영방송에서 떨어지면, 앞으로 언론사로 돌아오지 않겠다. 굳은 결심이었다. 그랬을까.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었을 거다. 껍데기가 두꺼워질수록 알맹이는 작아진다.  


허영이다. 알맹이가 빠진 허영. 내가 세상을 바꾸길 바랐다면, 언론이 투쟁의 산물이라 생각했다면 달랐을 거다. 다른 언론사 기자가 됐을 거다. 그리고 계속 투쟁을 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명함이 두터워지길 바랐던 거다. 정치인부터 학계에 유명한 인사들까지 사회 곳곳의 유력 인사들의 명함이 두둑이 쌓이길 원했었다.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내가 그 사람이라도 된 거라 생각했겠지. 누군가의 명함을 등에 업고 가면을 썼을 거다. 껍데기들이다. 영향력이 더 큰 언론사에 들어가면 명함이 두터워졌을 거라 생각했다. 종이 한 장에 담긴 숨겨진 이유였다. 돌이켜 보니 그랬다. 자기 최면에 걸린 듯 그때는 껍데기가 진실이라 믿었다. 그깟 종이 한 장에 말이다.



페르소나다. 가상의 면면들, 명함 속 이름들, 사회적 얼굴들이다. 구스타프 융이 언급한 '페르소나'처럼 가상의 관계들은 휘발성이 강했다. 얕은 바람에도 쉽게 사그라들었다. 모래 위 성이다. 이런 관계를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표라 쓰고 출사표라 읽던 패기로 사회 밖으로 나갔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하나 둘 인간관계도 끊어졌다. 낙엽처럼 줄줄이 떨어진 것이다. 힘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과거의 페르소나에 살고 있었다. 짓눌렸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의 이아고처럼 왜곡된 욕망일까. 알 수 없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역설적이게도 비우니까 채워졌다. 그 많던 명함들이 사라지고, 페르소나가 걷히고 나서 알맹이만 남았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감사함을 느꼈다. 내 안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한때의 나는 왜 그것을 알지 못했던가. 버스가 떠나고 후회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렸다면, 천천히 가면서 길옆에 핀 꽃들을 보게 됐다. 행운이라는 연화의 꽃말처럼, 그렇게 싹이 움텄다.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이었다.


앞으로의 에피소드는 노량진으로 가는 과정과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시절들의 고백이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인생의 피와 살이 됐던 경험이었다. 화양연화와 같이 찬란한 청춘의 일기, 지금부터 빗물의 짠맛과 소주의 단맛 같은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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