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주차. 임산부라도 가녀리고 싶어

생 로랑(Saint Laurent)의 엣지를 동경해야 해

by 드뭄씨



새벽 어스름이 햇살에 뒤꽁무니 빼기 시작하는 시간. 휴직으로 인해 오늘도 별다르게 할 일은 없지만, 아침이 밝았으니 또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느릿느릿 잠자리를 물리는 데 몸이 천근만근. 아니 근데 오늘은 실로 몸이 무거워 진 것 같습니다.


‘52.9kg’

괜히 체중계 따위에 상처받고 싶지 않아, 실오라기 남기지 않고 올라섰습니다. 그럼에도 냉정한 이 녀석은 발바닥에 닿는 냉기만큼이나 냉정하게 숫자를 제 몸에 찍어냅니다. 발꿈치를 살짝 들어보기도 하고, 숨을 잠시 참아도 봅니다. ‘좀 깎아주세요’ 값싼 적선을 바라는 심정으로 말이지요. 앗, 근데 꼬물꼬물 움직이니까 53이라는 숫자가 언 듯 비쳤습니다. 혼쭐난 아이처럼 비루한 몸부림을 급히 중단합니다. 그렇습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전, 어제보다 0.5kg 만큼 이 세상에 존재감을 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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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는다는 것. 둥글어지는 것.

둥그런 것을 지키기 위해 둥근 자리를 만들고 둥글어지는 일.

- 허은실 〈내일 쓰는 일기>’


허은실 시인은 임신을 직선의 팔을 구부려 둥글게 만들고, 슬픔도 물리쳐 밀어두며 ‘둥그런 둥지를 짓는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위험과 미혹을 물리치기 위한 모성의 모습으로요. 그래, 나는 ‘숭고한’ 일을 하는 과정을 수행중입니다. 얼마 전 필사를 통해 만난 이 문구를 매만지며 스스로를 다독여 보지만 마음은 쉽사리 추슬러지질 않습니다. 아니, 평소처럼 먹었을 뿐이고, 야밤엔 살찔까봐 자제하기까지 한 기특한 마음을 모르고 +0.5kg의 수치는 너무한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조금의 영양소 손실도 놓치지 않을 거라는 제 세포의 눈물겨운 모성애! 증가하기만 하는 몸무게의 비가역적 굴레에 마음이 멍들며 설움이 번집니다.



관리를 해야겠습니다. 몸무게 증가가 ‘모성의 자연스러움’이라는 건 핑계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엄마를 비롯한 혹자는 임산부가 체중조절이나, 다이어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자격’을 운운하며 날을 세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철딱서니 없다’고 나무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얼마 전 ‘열달후에’라는 앱의 산모체중관리를 통해 진단한 저의 몸무게 증가량은 예비맘 100명 중 5등 안에 드는 높은 수치였습니다. 평균치보다 2.5kg 높으며, 이는 해외 ‘kidspot’란 사이트의 결과와도 동일했습니다. 몸무게 증가가 모성애를 발현하는 척도라면 저는 이미 ‘임계치’를 넘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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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는 이번에 저보다 먼저 임신의 사실을 알린 나이어린 회사동료가 ‘만삭’ 인증사진을 올렸습니다. 팔, 다리 사지는 발레리나 같은 평소 그녀의 모습과 다름없네요. 볼록한 배만이 ‘만삭’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무뎌지고 흐려지는 외곽선이 임산부의 모범답안이거나, 살찌는 것이 외적인 자기희생으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입니다. 저의 알고리즘이 생성한 다른 임산부들만 살짝 훑어보아도 요즘 임산부의 모습이 달라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제 심리적 방어기제, 또는 무의식에게 외칩니다. “살찌는 데 핑계대지 말라!”고요. 매일 나다움을 조각하려는 노력, 몸매관리를 위해 갈고 닦은 모서리가 아이를 향하지는 않을 거라고요.



‘에르메스도 부드러워, 어쩌면 생 로랑(Saint Laurent)의 엣지를 동경해야해.’

1시간 웨이팅을 무릅쓰고 애월에서 사가지고 온 랜디스도넛을 단호히 물러내고, 오늘 아침 끼니로 바나나를 입에 물면서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단호해져야 할 때. 확실히 둘째가 되니 배가 불러오는 속도도 남다릅니다. 첫째 때는 만삭 때 최종 8kg증가로 마무리했지만, 둘째는 4개월 남짓 지난 시점에 벌써 5kg나 찍어버렸네요. 이때 필요한건 자극이 될 만한 이미지. 생 로랑의 중성적이고 날렵한 턱시도라인의 이미지가 좋겠습니다. 일단, 시작은 블랙핑크 로제의 생 로랑 화보 이미지를 구해다가 거실에다 붙여두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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