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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석 더 프리맨 Sep 30. 2023

망원동 사람들

[수필로그] 망원동 사람들-2 우리들의 천국 편

망원동 사람들

2. 우리들의 천국 편


우리는 늘 즐거웠다.


하수처리 용 개천변에서 뻥뻥 공을 차다 물에 빠지면, 금세 개흙이 묻어 볼링공처럼 까맣게 변했다.

그러면 누군가 쪼르르 달려가 꺼내서 시멘트 벽에 스무 번 쯤 공을 튀겨야 했다.


물은 썩어가는 음식 냄새도 진동했고 죽은 쥐(어떨 땐 살아있는)도 떠다녔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생각해보면 서울이지만 그래도 낭만(?)이 있었다.


 집마다 정원을 가꾸고 나무도 많아 심어놓아 여름이면 늘 송충이가 툭툭 떨어지고 사방에 기어다녔다.

사마귀, 송장메뚜기, 고추잠자리, 소금쟁이, 방아깨비... 벌레를 갖고 노는게 일상이었다. 


지금 생각하자면 을지로를 닮은 부산 서면에 살아 볼트와 너트, 베어링 등 공구를 갖고 노는 법에 더 익숙했던 나도 변했다.

곧 사루비아 꿀을 빼먹고 아카시아를 통째로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는 법을 배웠다. 


가끔은 친구와 어울려 한강을 갔다. 둔치가 없어 갈대숲을 헤치고 진탕을 넘어 한강으로 향했다. 그때는 강변북로도 편도 2차선, 좁으니 그냥 그대로 뛰어 건너도 됐다. 


얼마전 개통한 성산대교와 제2한강교(양화대교)까지는 다니는 차가 별로 없어 로드킬 따윈 걱정 안해도 됐다. 다행히 고라니 신세는 면하고 살았다.


한강에서 남생이(민물 거북이의 일종)를 잡아다 남대문에 갖다 팔면 마리당 몇백 원씩 쳐준다는 말에 학교를 며칠 빠지고 아예 남생이 포획에 나선 친구도 있었다.


그때 돈을 꽤 많이 벌었지만, 나중에 멸종위기종이라 천연기념물(제453호)이 됐다는 후일담이다.


이를테면 모두가 어부였고 농부였다. 지극히 자연과 함께한 서울, 망원동의 삶이었다.


지금은 망원시장과 성산(월드컵)시장이 거의 구분이 없지만, 예전엔 각기 따로 상권이 있었다. 시장 터는 모두 지붕도 없는 비포장 흙 땅이라 비만 오면 진창이 됐다.

성산시장 2층짜리 건물 앞에는 닭집이 있었는데 살아있는 닭을 3단짜리 철망에 가둬놓고 팔았다. 요즘 활어횟집처럼 고르면 잡아주는 방식이다.


워낙 장구경(장국영 아님)을 좋아하던 나는 심심할 때면 엄마 따라 시장을 다녔다. 누군가 주문을 하면 바로 닭을 잡아 튀겨줬다.

서로를 믿을 수 없던 ‘불신용 사회’였던지라 엄마는 우리가 고른 닭을 주인이 작은 닭으오 바꿔치지 않는지 옆에서 가만 지켜보라고 했다.


식칼에 목을 찔려 바들거리던 닭이 십여 분 후 가마솥 안에서 통닭으로 변하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닭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이 광경을 모두 목도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이른바 ‘닭멍’이다.

우리는 각각 시장을 중심으로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즐겁거나 슬퍼도, 때론 아파도 언제나 시장을 가는 것이 일과였다.

명절 설빔과 추석빔도 시장에 있었고 떡 같은 제수용품도 시장 옆에 몰려있었다.

망원1동 유수지 용머리에서 망원2동 커다란 밭(무엇을 길렀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영풍가든) 앞으로 이사를 간 이후로 난 성산시장권으로 옮겨갔다.


시장은 언제나 활기로 가득 찼다. 내과, 이비인후과, 안과, 치과도 시장 앞에 있어, 볼거리나 풍진, 아폴로 눈병이라도 돌면 아픈 친구들은 근처에서 죄다 만날 수 있었다.


문화생활도 시장 앞에서 이뤄졌다. 레코드 가게에서 주인에게 기타를 배웠고 2층 탁구장에선 펜홀드 라켓 쥐는 법을 배웠다.

82년 개업한 선문 주산학원에선 강의실에 14인치 컬러 TV를 달아놓고 최가박당 시리즈 같은 비디오(자막이 엉성한 타자 글씨였던 불법이다)를 틀어주며 영화를 본 아이들에게 신청서를 내밀며 가입을 권유했다.

난 단 한 달도 가입하지 않고 매번 동생과 함께 영화를 보러갔던 터라 가끔 “오지말라”며 타박을 받았다.


 아무튼 요즘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 등 OTT 시절을 포함하더라도 내가 영화를 가장 정기적으로 많이 본 시기였다.


성산시장에서 동교초등학교 정문까지 이어지는 길은 망원2동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명동 허바허바와 같은 현상, 인화기를 쓴다는 허바허바 사진관도 학교 뒷문 언덕에 있었고, 가장 으리으리한 하얀풍차 빵집 옆엔 yy가 크게 써있는 브랜드 ‘요넥스’(물론 티셔츠 한 장도 살 수 없었지만) 매장도 있었다.

그 길에는 오락실이 없었지만 군것질 거리는 가끔 있었다. 시장 안에 떡볶이와 오뎅을 파는 좌판이 몇 집 있고 길가에는 슈퍼, 시장 노지엔 어쩌다 사탕과 젤리를 근 달아서 파는 주전부리 좌판이 나왔다.

학교 바로앞 동교문방구와 아래쪽 제일문방구에선 달고나(부산에선 쪽자)를 팔았다.

물에 담가놓은 국자를 꺼내 설탕이나 사탕을 연탄불에 얹은 후 살살 녹인 다음 대나무 젓가락으로 베이킹파우더를 넣고 휘휘 저어 부풀려 먹었다.

 반공일인 토요일엔 병아리 장수나 튀김장수도 학교 앞에 진을 쳤다.


좋았지만 문제는 다 돈이었다는 것이다.


용돈은 없었지만 구할 수 있는 방법도 있었던 것 같다. 시골에서만 ‘서리’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몇몇 친구들은 슈퍼에서 ‘햄서리’를 하다 걸리기도 했고, ‘말 서리’를 전문으로 하는 친구도 있었다.(서리가 아닌 ‘스리’라 불러야 하나)

말 서리란 무엇인고 하면 포니2 승용차 뒤에 붙은 조랑말 모양이나 PONY 로고를 드라이버로 떼다 파는 것.  카센터에선 몇백 원을 쳐줬다.(차주는 그 카센터에서 자기가 도둑맞은 조랑말을 되샀을게다) 


부모님은 그런 친구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 했고, 가끔 학교 가정통신문에도 절대로 하지말라 경고를 했지만 같이 놀면 좋았다. 깐도리(50원 짜리 팥맛 하드)나 달고나를 한입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학교에 아폴로(빨대사탕) 한 봉지를 들고오면 인기를 독차지 했다. 무려 100개나 들어있어 대부분 나눠먹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즈음 싸웠거나 사이가 썩 좋지 않은 친구에겐 보란듯이 냉대하며 절대 주지 않았다. 아폴로 빨대를 문질러 알맹이만 깨끗이 빼먹는 방법을 그때 배웠다.


그 당시 최신 발명품이던 종이팩 우유를 먹고 잘 접어서 발로 밟아 ‘빵’하고 터뜨리는 법, 야쿠르트 밑면을 송곳니로 깨물어 먹는 이상한 방법도 누군가 알려줬다.


그래도 늘 즐거웠다. 우리는.


<3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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