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석 더 프리맨 May 04. 2024

업계 선배님들, 잘 지내셨어요?

[여행칼럼] 여행작가 선배님 전상서, 그들이 여행을 담는 방식


여행을 담는다는 것, 모두 달랐다. 
마크 트웨인에겐 글이었고 
폴 고갱에겐 그림이었다. 

폴 고갱은 타히티의 푸르름을 화폭에 담았다.  "사랑합니다 고갱님"


요즘으로 치면 여행작가의 대선배들이다. 물론 그 이전엔 ‘마르코 폴로’도 있었고 네덜란드인 ‘하멜’, 우리나라엔 ‘혜초’와 ‘윤선도’가 있었다. 명나라의 환관 ‘정화’도 함대를 끌고 엄청나게 돌아다녔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의 글과 그림을 통해 미지의 땅으로 떠나는 여행의 꿈을 키웠을 것이다. 아닌가? 

전남 강진 어느 무인텔에서 소주를 잔뜩 마시곤, 타고난 역마살 신세를 한탄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직업이 언제 생겼나 궁금해져 찾아봤다. 여행(탐험)만 떠난 게 아니라 뭐라도 마감(기록)을 했어야만 가히 여행작가의 칭호를 붙일 수 있지 않겠나. 본인이 좋든 싫든 외국의 풍경과 생활을 소개했던 2인의 작가 그리고 여행가(?)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글로벌(Global)이 아닌 ‘글로 (돈을) 벌’ 욕심으로 세계일주를 한 작가가 여기 있다. 미합중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도선사(導船士)였다. 요즘 같으면야 고수입의 전문직이지만 당시에는 그저 그랬던 모양이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란 필명 역시 강 깊이를 측정하던 업계용어에서 따왔다. ‘2야드 깊이’로 배를 대기에 최소의 안전한 깊이를 나타낸단다. 아무튼 이 직업은 해외로 떠나기 딱 좋았다. 

마크 트웨인은 선원 생활을 하다 골드러시에 금을 찾기 위해 서부로 갔지만, 딱히 재미를 못 봤다. 영혼까지 끌어서 주식에 투자했다가 전 재산을 말아먹기도 했다. 신문사에 들어가 기자가 된 계기다. 기자의 생활수준은 했다. 남북전쟁 때는 남군에 입대했다가 바로 탈영했지만, DP에 잡히진 않았다. 



트웨인은 예순이 넘어 증기선을 타고 무려 1년짜리 세계여행을 떠났다. 이 역시 여행책을 잘 만들어서, 자신이 진 산더미 같은 빚을 탕감하려는 목적이었다(100년이 지난 요즘도 이처럼 처량한 신세의 ‘글로 벌’ 출판인들이 주변에 많다). 여행은 프랑스 파리 출발, 하와이와 호주, 피지, 뉴질랜드, 스리랑카, 인도, 남아프리카 등을 경유해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트웨인은 특유의 필력으로 곳곳의 풍경과 생활, 습관, 풍속, 이벤트 등을 기록해 글로 남겼다. 이를 보고 많은 구대륙의 사람들이 여행에 대한 꿈을 가졌고 실제로 떠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마크 트웨인은 천부적 여행가 팔자였다. 우주여행을 다니는 별 ‘핼리혜성’이 지구에 왔던 1835년 태어나, 또다시 핼리혜성이 돌아온 1910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였다.



공교롭게 폴 고갱도 도선사였다. 당시 선원은 최고의 글로벌한 직업이었던 셈이다. 역시 삶이 겹친다. 선원 생활을 접은 고갱은 증권사에서 주식중개인을 했는데 그 역시 마크 트웨인처럼 망했다. 아, 망해야 여행작가를 하게 되는가? 아무튼 쫄딱 망한 고갱은 여행작가가 아닌 전업화가를 선택했다. 


당시 파리 화단에는 쟁쟁한 경쟁자가 많았던 터라 ‘해외로 나가 보자’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중남미 파나마와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섬을 다녀왔다. 이런 라이프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던지 그는 해외에서의 경험을 자신의 그림에 살렸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해외여행 사진전 같은 것을 열었던 모양이다. 

파리에서 점차 인정받고 있었지만, 그의 방랑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역대 가장 성대하게 열린 파리 만국 박람회(1889년)에 다녀온 후 고갱은 머나먼 태평양 타히티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거창한 꿈을 간직한 그는 타히티에 정착하며 정작 생각만큼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오만한 태도도 문제였지만 현지 원주민 여성들과의 복잡한 관계도 그의 명성에 금이 가게 한 요소였다. 

하지만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낯선 풍경과 문화를 유럽에 전달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고갱은 타히티와 프랑스를 왔다 갔다 하며 ‘타히티 전문 작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마키저스 제도의 ‘히바오아(Hiva Oa)’로 거주지를 옮겨가며,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에게나 낯선 태평양의 생활습관과 풍경을 화폭에 남겼다. 1903년 5월8일, 폴 고갱은 이역만리 땅 히바오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행업이 본격적으로 대두하던 초창기 여행작가(?) 2인의 글과 그림은 여행을 위한 큰 영감과 동기를 대중에게 선사했다. 그 당시로선 이 같은 여행 콘텐츠가 흔치 않았다. 휴대할 수 있는 사진기와 순식간에 텍스트를 전송하는 이메일이 등장하며, 다른 이에게 자신이 선험한 ‘여행자의 동선과 일상’을 명확하게 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디지털카메라가 나왔고 초고화질 액션캠이나 중국이 자랑하는 4대 문명기기 중 하나인 드론과 인스타360까지 떠올라 여행지를 독자(시청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여행 콘텐츠의 진화는 여행문화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깊은 족적을 남긴 마크 트웨인과 폴 고갱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사랑합니다 고갱님, 그리고 트웨인님. 아, 국내 최초의 여행작가 김찬삼 교수님께도 함께 경의를 표한다. 


<놀고먹기연구소장>

작가의 이전글 꼬일대로 꼬여도, 꽈배기 안먹곤 못 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