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최성용(민주적 사회주의자 편집팀장)
냉전의 시대, 제1세계에도 제2세계에도 속하지 않던 탈식민국가들은 1955년 반둥회의에서 본격화된 비동맹 운동이라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른바 제3세계 진영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당시 중국은 그 흐름을 주도했던 나라 중 하나다. 여기엔 중국이 가진 힘과 지위만이 아니라 역사적 상징성도 한몫을 했다. 끈질긴 반제국주의 운동을 통해 국가를 건설했으며, 제2세계 내부에서도 중심국가인 소련과 긴장 관계를 형성하면서 나름의 독립성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제국주의와 비동맹 운동의 유산을 가진 중국에게 ‘주권’은 민감한 문제로 다가오기 쉽다. 특히 오늘날 미-중 간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중국은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서 자신의 독립적인 주권의 행사를 방해받고 있다는 불편함을 감추지 않는다. 홍콩 시민들의 민주주의 요구에 대해 ‘하나의 중국’이라는 주권 국가로서의 원칙을 흔드는 것이라고 반응하거나, 시위의 배후에 미국이 존재한다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도 이런 맥락과 닿아있다. 즉, 홍콩 시위를 중국의 주권 침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다가 대만이라는 눈엣가시의 존재가 ‘하나의 중국’이란 이상을 실질적으로 위협하고 있기에, 중국은 홍콩 시민들의 요구를 ‘주권 흔들기’로 받아들인다. 중국 유학생들이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대자보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또한 중국의 청년세대가 강력한 내셔널리즘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일 터이다.
허나 중국과 중국 유학생들이 말하는 ‘하나의 중국’은 ‘정상국가’라는 허상에 대한 내셔널리즘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정상적인 국가의 형태(하나의 중국)와 완전한 주권이라는 어떤 이상적 형태를 전제하고서, 그 이상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주권 침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식의 내셔널리즘은 선악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의 구도를 내장한다. 즉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려는 ‘선’과 그것을 방해하는 ‘악’의 대립이다.
하지만 정상국가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과 같다. 중국 주변만 둘러봐도 정상적인 형태를 갖고 주권을 누리는 국가가 과연 존재하는가? 분단된 남한과 북한, 군대를 갖지 못하는 일본,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대만 등. 애초에 회복해야 할 국가와 주권의 정상적인 모습이라는 것 자체가 상상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재의 상황이 그 허구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중국으로 하여금 홍콩 시민들에게 대한 국가폭력을 가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홍콩이 요구하는 것이 ‘독립’이 아니라 자치의 실질적 보장이라는 상식적인 사실조차 무시된다. 이 허구에 대한 지향은 비단 홍콩만이 아니라 대만에도 적용되며, 티베트와 신장위구르의 경우 홍콩 시위 이전에 심각한 국가폭력을 겪어왔던 바 있다. 이를 문제제기하는 많은 ‘외부’의 목소리들은 부당한 ‘주권 침해’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주권’의 추구가 절대적으로 무용하고 해로운 것이라고 말할 순 없다. 정확히 말하면, 시대에 따라 주권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봐야 한다. 식민지배 시기에 민족의 자기결정권으로서의 주권 추구는 긍정적이고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지배에 대항하는 피억압자들의 논리이자 이념이었다. 이윽고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벗어났을 때, 이념 대립에 기초한 냉전은 정상적인 주권 국가에 대한 제3세계의 열망을 다시 한 번 가로막았다. 중국에겐 홍콩과 대만의 존재가 그러했고, 한반도에선 분단선이 그어졌다. 당연히 정상적인 국가를 만들고파 하는 열망은 해소되지 못한 채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흘렀고, 더 이상 20세기 초반 중국이 외치던 주권과 21세기 중국이 말하는 주권이 같은 의미일 수 없다. 맥락이 너무나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전자의 주권이 수많은 제3세계 민중들의 열망을 대변하는 피억압자의 권리였다면, 후자의 주권은 피억압자였던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며 홍콩에 대한 억압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를 ‘반식민주의의 역설’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식민주의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식민주의 내셔널리즘 운동이 20세기 제3세계 국가들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었지만, 식민지배 국가들을 지향해야 할 정상적인 모델로 삼았다는 점에 있어서 한계를 노정했다. 반식민주의 운동은 식민 지배를 벗어난 이후에도 회복해야 할 정상국가(사실상 허구인)를 열망하면서 국가 내부의 시민을 향해 (식민주의가 그랬듯) 국가폭력을 자행했다. 이처럼 반식민주의는 식민주의로부터, 식민지배 국가들로부터 ‘내셔널리즘’을 배웠다. 식민지배 국가들이 누린 주권을 가진 국가가 반식민주의 내셔널리즘의 목표였고, 그런 의미에서 반식민주의는 식민주의와 거울쌍의 관계였다. 21세기에도 식민지배 국가들이 누린 ‘주권’을 모방하려는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는 낡은 내셔널리즘적 상상력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식민 지배의 잔재다.
그러나 21세기인 지금, 20세기에 온전한 주권의 달성을 위해 제3세계 국가들이 겪었던 전쟁, 학살, 국가폭력의 경험을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중국도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한반도에서도 양 진영이 국가 건설 과정에서 참혹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은 냉전 속에서 수많은 민간인에 대한 고문과 학살을 정당화했다. ‘온전한 주권’을 염원하는 탈식민국가들의 건설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런 폭력은 아주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에도 과연 ‘정상국가’와 ‘주권’이 지향해야 할 가치이자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이미 한국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정상국가가 되길 욕망하는 일본을 겪고 있다. 홍콩 시위에 대한 중국의 국가폭력도 마찬가지다. 식민주의와 반식민주의가 거울쌍이라면 그 둘 모두를 거부하는 ‘탈식민주의’와 ‘탈내셔널리즘’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일국양제라는 제도는 이념의 차이가 폭력과 전쟁에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정상국가 모델을 넘어서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그 시도를 포기하고 20세기로 되돌아가려 하는 중이다. 이는 중국의 ‘주권’ 추구가 홍콩의 자기결정권 추구를 억압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사실 중국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근거 삼아 일본 제국주의가 자신들에게 가했던 폭력을 지금 홍콩에게 가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이 내셔널리즘 너머를 상상하지 못하는 이상 홍콩 시위는 계속될 것이다.
그렇게 홍콩 시민들은 용감히 떨쳐 일어났다. 홍콩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한국의 경험을 참조점으로 삼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식민주의와 냉전이 만들어낸 국가폭력과 억압에 대항해 온 역사다. 그 폭력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평범한 사람들이 불의에 분노하고 폭력의 피해자에게 깊은 연민을 표하며 연대해온 정의로움의 역사다. 더 이상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 받고 억울하게 다치거나 죽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수차례의 민중항쟁을 이끌어낸 동력이었다. 지금 홍콩도 마찬가지다. 홍콩 역시 식민주의와 냉전에 의해 다치고 찢겨진 역사를 고스란히 갖고 있다. 영국 제국주의가 홍콩시민들을 향한 억압의 구조를 만들어냈고, 영국이 나간 자리에 중국이 들어앉아 그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 한국이 겪었던 운명과 홍콩이 처한 조건은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은 더 이상 홍콩 시민을 다치거나 죽게 하지마라. 광주의 나이든 시민들은 지금도 5월이 되면 온 몸의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 국가폭력은 대를 이어 그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그러니 홍콩 시민들이 감당해야 할 비통함을 더 이상 늘리지 말라. 그것은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는 국가에 의한 범죄에 불과하다. 그리고 죽음조차 불사하고 고통 받는 동료시민에 대한 연대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보여주는 홍콩 시민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억울한 고통과 죽음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은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지탱해온 힘이었다. 그 힘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바꿔왔는지 알고 있다. 홍콩도 그리될 것이다. 그 가슴 벅찬 변화의 도정에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