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주적 사회주의자 Dec 07. 2019

[청년 정치 기획연재1] 청년들은 이미 늙었다.

by 이재랑(민주적 사회주의자 편집팀)

성큼성큼 4월 총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4월 총선으로 이어지는 레이스가 본격화되는 지금, 가장 큰 이슈는 바로 ‘청년 정치’입니다. 두 거대정당에서는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세대교체를 주장하는 의원들이 나타났고, 시민사회에서는 청년정치와 관련해 활발한 논의와 행사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의당 내부에서도 청년 정치인의 양성과 관련해 특히 여성 청년 정치인들을 육성하거나 영입하고 있으며, 청년 후보자 지명 방식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정의당 내 의견그룹인 <민주적 사회주의자>에서는 현재 청년 정치에 대한 내부토론 중에 있으며 앞으로 내부의 논의가 진행됨에 따라 논의 과정을 외부에 개방하면서 ‘청년 정치’ 담론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갈 생각입니다. 그 시작으로서 우선 청년 정치에 대한 기획 연재를 시작합니다. 우선은 <민주적 사회주의자> 활동가들의 청년 정치에 대한 입장과 고민들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해보려 합니다. 논의를 진척시켜 나가는 가운데 내부의 토론 결과 등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작년 8월 한 교육감의 글에 2600개의 좋아요, 1600개의 댓글이 달렸다. 공무원들의 SNS가 으레 그렇듯 평소 100개가 안 되는 ‘좋아요’를 받을 뿐이던 노옥희 울산 교육감의 이런 갑작스러운 인기(?)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글의 내용은 다음 날(8월 24일) 예정된 태풍의 위험 때문에 휴교 권고를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었다. “울산 유치원, 초등, 중학교, 특수학교는 휴업, 고등학교는 오전 10시 이후 등교 권고 결정했습니다.” 고등학교는 ‘휴업’이 아니라 ‘10시 이후 등교’를 권고한 것이다. 고등학생만 차별하는 이 불공정에 대한 항의로 댓글란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런 결정을 내린 교육청의 잘잘못을 말하기 전에, 학생들의 분노가 향하는 지점이 자못 흥미롭다. 휴교 결정 기준의 합리성, 권고 대상의 선정 범위, 태풍의 실질적 위험에 대한 교육청의 판단 근거 등은 당연히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그 중에서 특히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초중생은 쉬는데 왜 고등학생인 우리만 못 쉬느냐는 성토였다. 상대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불공정’으로 곧바로 받아들이는 아찔한 윤리성이다. 사태가 이처럼 흐르게 되면, 다음 날 실제로 태풍이 불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고등학생들이 ‘차별’ 당했기 때문이다. 공정성에 대한 학생들의 감각은 이처럼 날카롭다.


 근래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조국 사태'는 이들이 말하는 공정성이란 무엇인지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조국 장관의 각종 논란과 자녀 대입 특혜 논란에 부쳐 서울대, 고려대 등지에서 조국 사태에 분노하는 집회들이 빈번하게 열렸다. 그런데 고려대 집회 집행부에 분교인 '세종캠' 학생 1명이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쟁이 붙었다. 결국 이 학생은 물론 이 학생의 참여를 옹호하는 학생들마저 채팅방에서 퇴출당했다. 조국에 의해 훼손된 사회정의와 공정성을 부르짖을 권리가, 우리와 다른 입학 성적으로 들어온 6두품에겐 허락되지 않는다는 준엄한 경고였다. 조국도 공정하지 않지만, 입학 성적이 낮은 자가 같은 레벨로 놀겠다고 덤비는 것도 공정하지 않은 것이다.

청년세대에 대한 공정성 담론은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출처 : jtbc 썰전)

 이들이 말하는 공정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등교시간이라는 기준에서도 고등학생이 불리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많은 학년이라고 해서 나이가 어린 학년을 위해 희생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 사회정의를 외치는 집회장에서도 같은 기준으로 공정하게 경쟁해서 대학을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같은 '명문대생'의 지위를 누리는 것을 허락지 않아야 한다.      


 결국 이들의 공정성은, 개인을 둘러싼 개별적, 환경적 차이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같은 기준에서의 경쟁을 말한다. 이들의 생각에 비추었을 때, 공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선 사회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 초, 중학생은 '공정한 기준' 안에서 고등학생과 경쟁하면 된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 '공정한 시험'의 결과물인 국영수탐 수능 점수로 소득이 분배되어야 한다. 바리스타나 프로그래머가 열심히 일해서도 그만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노동하는 과정의 노력이 아니라 학창시절의 노력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악한 노동환경은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불성실했던 학창시절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라면 등교시간 차등분배 역시 문제가 된다.


 그러나 시험도 학벌도, 학생의 권리 뿐 아니라 평생의 인권을 절차적으로 '공정하게' 분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비상시 안전대책도 마찬가지다. 더 어린 학생들을 위한 배려가 게임의 룰로서 공정한가 아닌가를 따지는 태도는, 경쟁의 대상이 아닌 것마저 공정하게 경쟁시켜야 한다는 강박의 산물이다. 이 등교게임을 뛰는 선수들은 트랙의 안과 밖을 구별하지 못할 만큼 승부에 집착하고 있다.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고려대라는 지위를 노력하지 않은 자들과 왜 함께 나누어야 하는가'라고 따져묻는 고려대생들은 그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누군가에겐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애써 망각한다. "대학을 일찌감치 포기한 채 19살 때부터 노동을 해야만 했던 우리에게는 논문이나 입시제도 같은 것조차 딴 세상 이야기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 잡을 수 없는 출발선에 청년들은 분노한다." 노동자 단체 '청년 전태일'이 주최한 대담회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누군가에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이 싸움에서 '명문대생'이라는 타이틀은 정녕 '공정한 경쟁'의 결과물일 수 있는가?


 애초에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기가 3루타를 친 줄 안다(배리 스위처)"고 착각하게 만드는 이 사회 질서는 결국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았는지를 알려준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패러다임이 보편적 인권의 영역마저 공격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경쟁이라는 말만 붙이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무조건 공정하고, 경쟁에 의한 결과는 그것이 불평등이든 차별이든 무조건 최선이라는 경쟁만능주의를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경쟁의 영역 밖에 놓여 있어야할 많은 것들이 공정성이란 외피를 덧입고 경쟁을 통한 분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보편적 평등의식 따위는 사치스러운 농담으로 비친다." 이쯤 되면 학생들의 모습에서 어른들의 얼굴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우리의 질서가 학생들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이런 사회 질서를 내면화한 것은, 결국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낸 질서를 습득한 데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청년들에게만 이 질서의 책임을 묻는 건 옳지 않다. 공정성에 대한 그들의 신경증적인 집착은 달리 말하면 이 사회에 여태껏 공정성이란 없었음을 방증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어쩌다 청년들이 이렇게 되었나?"가 아니라 "어쩌다 청년들이 '이런 세상'에 살게 되었나?"여야 한다. 이런 청년들의 모습도 결국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의 산물이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이미 늙어버렸고, 그 늙음은 지금의 사회 질서를 만들어낸 기성세대의 모습과 꼭 닮아있다. 결국 청년들의 노화를 막기 위해선 이 낡은 사회 질서를 깨부숴야 한다. 소위 민주화 이후 한 번도 이 '신자유주의적 질서' 자체를 문제시 하지 않았던 기존의 집권 세력과 결별해야만 한다. '청년 정치'란 청년의 요구를 절대적으로 수용하는 정치도 이미 늙어버린 청년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정치도 아니다. 이 낡아버린 질서를 깨부술 새로움으로 무장한 정치여야만 한다. 이를 위해선 지금의 사회를 만든 기성 세대가 아니라 청년들이 진정 본받을 만한 다른 '좋은 꼰대'들을 호명하는 수밖에 없다. 이미 만들어진 사회의 질서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적응하라는 요구를 단호히 물리칠 수 있는, 그리고 그 가능성과 방법을 청년들에게 전수해줄 꼰대들.      


 과거 왕조 시대에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는 좋은 꼰대란, ‘왕’이었다.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는 “‘현대의 군주’란 계급과 결합되어 있는 정치적 ‘정당’”이라 말한 바 있다. 그람시의 정의에 동의한다. 그리하여 결국 늙은 청년들에게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해 줄 좋은 꼰대란, 현 시대에선 거의 유일하게도 좋은 ‘정당’ 뿐이다.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단호하게 맞서 싸울 강력하고도 정의로운 ‘정당’의 정치. 이 사회의 젊음은 결국 그곳에 있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