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성인지 감수성을 깨우는 글이 되기를 희망하며
이 글은 실제 학교 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사로서 성인지 감수성을 배우고 성장해 온 과정을 기록한 글입니다. 특정 인물이나 학교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놓쳐버린 경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한 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 교장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선생님, 저번 학교 행사 때 어른이 학생의 어깨에 손을 올렸는데, 하필이면 그 손이 가슴에 닿았나 봅니다. 아이를 불러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세요. 제가 그 어른은 이미 만났는데, 기억도 안 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학생에게 '별일 아니다.' '나쁜 의도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해 주세요."
당시 저는 신규 교사였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지시대로 학생을 만났습니다.
"교장선생님께 이야기 들었어. 많이 당황스러웠겠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 어른을 잘 아는데, 나쁜 의도는 없었을 거야. 아마 어깨동무하려다 손이 하필이면 가슴 쪽에 닿았나 보다. 네가 이해해 줄 수 있겠니?."
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교장 선생님께서 다시 저를 부르셨습니다.
"선생님, 그 학생 어머니가 어제 교장실로 전화해서 화를 많이 내셨습니다. '무슨 선생님이 그렇게 상담하느냐'고요. 어머니랑 통화해 보세요. 그런데 그 어머니랑 아이, 정말 예민한 것 같아요. 별것도 아닌 걸로 시끄럽게 하네요."
저는 당황스러웠습니다. 교장선생님 말씀대로 했을 뿐인데, 어머니는 왜 화가 난 걸까.
교장선생님 말씀처럼 예민한 아이와 보호자를 탓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해바라기아동센터의 활동가 선생님께 이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른이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손이 정말 가슴에 닿았는지가 중요하지 않아요. 그분은 학생과의 '경계'를 넘은 겁니다. 그리고 아이가 불쾌했는데, 선생님이 '그분은 나쁜 의도가 아니다'라고 말했잖아요.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분명 나쁜 의도입니다. 학생을 만나서 사과하세요. 혹시 아이가 상담을 받고 싶다고 하면 저희 센터에 연락 주세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가 잘못한 것이 많았더라고요.
만약 이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면 저는 교장 선생님 말씀처럼 아이와 보호자를 '예민한 사람'이라고
탓했을지도 모릅니다.
곧바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어머니, 제가 신규교사라 상담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어제 아이에게 잘못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제가 아이를 불러 사과해도 될까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아이가 보건수업도 좋아하고 보건실도 자주 갔었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이 친절해서, 자기 말을 잘 들어줄 거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자기 말을 의심해서 많이 실망했데요. 이렇게 전화해 주시고, 아이에게 사과한다고 하시니 고맙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보건선생님께 가라고 하겠습니다. 또 아이에게 해바라기 아동센터 상담이 필요한지도 물어보겠습니다."
그날, 아이를 직접 만나 사과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 눈빛에서 용서를 배웠습니다. 제가 사과했다고 해서 그 아이가 입은 모든 상처를 깨끗이 지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날 이후 저는 평생, 아이에게 사과하는 마음으로 교직생활을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피해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느 학교에서는 모범적인 남학생의 성적 언동이 학교폭력으로 신고된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은 학교폭력위원회 결정에 따라 친구에게 사과했고, 피해 학생이 용서하면서 사건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남학생의 어머니가 울면서 보건실을 찾았습니다.
'선생님, 저는 정말 너무 힘듭니다. 제가 뭘 잘못해서 아이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 많이 당황스럽죠. 어머니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알았으니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겁니다. 아이는 사과했고, 피해를 입은 아이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는 건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가 중요합니다. 이번 일을 통해 아이가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계속 아이에게 사랑을 주세요."
자기 때문에 울고 있는 엄마를 보고 아이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분명 깊은 죄책감 속에서 자신을 끝없이 탓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호자는 울어서는 안 됩니다. 보호자는 아이가 그날을 기억하며 적절한 경계를 세우고, 다른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으며 잘 지내게 되리라 믿어야 합니다. 믿는 만큼 아이는 성장할 것입니다.
한 학교에서는 피해 학생의 어머니가 다른 학생 보호자에게 피해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사건이 순식간에 퍼진 적이 있었습니다.
가해 학생의 어머니가 분노하며 학교를 찾아왔습니다.
"우리 아이가 잘못한 건 맞아요. 그리고 우리 아이가 사과까지 했잖아요. 그런데 왜 피해자 측에서 비밀을 지키지 않는 건가요? 이젠 이사를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때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사건에 대한 비밀유지는 피해자 뿐만 아니라 가해자 그리고 학교 전체의 회복을 위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요.
저 역시 교사가 되기 전까지 성폭력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막상 성사 안이 발생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건 저뿐 아니라 많은 보호자들도 같을 겁니다.
학교 현장에서 20년 넘게 성교육을 담당하며, 학교폭력 전담기구에서 수많은 사례를 마주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저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성폭력에 대해 모르면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지금 저는 양성평등진흥원 폭력예방 전문강사로 위촉되어 교직원과 학부모, 그리고 아이들에게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교육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년 전 저처럼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했던 어른들이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성장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쓴 ' 교실 속 수업기록'입니다.
많은 학생들과 보호자, 교사, 우리 모두가 성폭력 발생 시 어떻게 대응하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디 이 글들이 여러분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성인지 감수성을 깨우는 글이 되길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