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피의 기만

시상식 이면의 정치학

by 덴덴마스터

권위의 탈을 쓴 인기투표


팝 음악에 심취했던 시절, 매년 말 열리던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와 연초의 그래미 어워드는 놓칠 수 없는 중요한 행사였다. 한 해 동안 나온 음악들 중 엄선된 '좋은 음악'들을 확인하는 자리로서의 상징성이 무엇보다 컸다. 소울 트레인이라든지 BET라든지 각종 시상식은 음악에 관한 나의 안목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는 자리이기도 했다.


철이 들고 음악을 듣는 폭이 넓어지면서 시상식이 가지는 권위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한 해 동안 쏟아져 나오는 모든 음악을 다 듣고 판단할 수는 없을 텐데,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우열을 가리는지 궁금했다. 실상을 들여다보니 대개는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이들의 투표, 선택된 소수에 의한 추천 등 폐쇄된 집단이 결과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인간의 취향은 음식이나 음악이나 주관의 개입이 크다. 주관들이 모여 객관성을 이룬다고 하지만, 문제는 시상식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 대개는 집단적인 편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이 문제는 음악을 넘어 영화 및 다른 분야에 이르면 그 심각성은 더욱 커진다. 대중문화 예술계에 몸담은 사람들일수록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들 내부의 편향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내부에서 다른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관성은 더 크기만 하다.


이런 폐쇄적이고 편향적인 사람들이 매년 모여서 하는 인기투표는 '시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세련되게 포장한다. 세계 몇 대 영화제라든지, 몇십 년째 이어지는 음악 시상식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조금만 들춰보면 고립된 집단의 인기투표, 협상, 담합의 향연이 벌어지는 곳이지만, 그곳에서 선택받은 작품은 '권위'라는 환상을 부여받는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어 웅장한 장면을 연출하고, 영상과 음악의 현란한 퍼레이드가 펼쳐지며 권위라는 환상은 구축된다. 이를 시청하는 대중은 화려한 조명 아래 엄숙하게 펼쳐지는 시상의 순간에 압도되어, 본질인 작품은 잊은 채 치밀하게 기획된 위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여기서 나온 가짜 '권위'는 대중에게 소비 방향성을 제시하고, 피리 부는 사나이에 홀린 아이들처럼 그 뒤를 따라간다. 좋게 말하면 권위에 대한 굴복, 나쁘게 말하면 주관 없는 선택. 대중의 무지 덕분에 예술적 권위라는 환상이 만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교한 기만, 예술


시상식은 작품에 각종 서사를 부여한다. 아니, 단순히 부여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이를 부여하기 위해 존재한다. 성공의 내러티브건 실패의 내러티브건 시상식이 만들어준 스토리는 각 객체에게 소비될 명분을 만들어준다.


어떤 영화가 유수의 영화제에서 최다 부문을 수상했다는 이야기는 작품이 우수하다는 근거로 쓰인다. 어떤 가수가 해당 뮤직 어워드의 몇 개 부문을 수상했다는 이야기로 그 앨범이 대단하다고 간주되기도 한다. 어떤 감독은 평생 상을 못 받아서 저평가받았다는 이야기를 써나간다. 어떤 가수는 최다 노미네이트되고 하나도 못 받아서 차별받는다는 평가도 나온다.


생각해 보면 그냥 인기투표에서 진 것뿐이지만, 그들에게는 거대한 서사가 부여되고 마치 대단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돌변한다. 그리고 이 서사의 칼날 끝이 향하는 곳은 소비자들의 지갑이다. 이런 이야기에 약한 대중은 결과에 기만당하면서 자연스레 돈을 써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소규모 그룹의 인기투표가 끌어낸 결과다. 제작자들이 제작비에 준하는 혹은 그 이상의 돈을 쏟아부어 시상식에 공을 들이는 이유도 여기 있다.


시상식이란 자본이 만든 하나의 알고리즘이다. 그들이 원하는 방향에 최적화된 상품을 예술로 포장해 주고, 시상식의 권위를 더한다. 그렇게 시상식을 통해 소비자들은 자신의 취향이 '예술적'이라고 착각하고 자신의 시각이 '옳았다'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 작품 자체를 감상하기보다 나르시시스트적으로 자신의 높은 수준(혹은 그렇게 보이는 것)을 인정받는 느낌을 받기 위해 감상에 돌입한다. 작품을 감상하기보다는 이를 감상하는 자신에게 빠져든다. 그러는 사이 꾸준히 지갑은 얇아진다.


트로피가 증명하는 건 예술적 완성도가 아니다. 폐쇄적인 집단으로부터 승인받았을 뿐이다. "시상식"이라는 가면 뒤에는 집단 내의 이해관계, 정치적 안배 등이 치열하게 부딪치고 결과적으로 최적의 작품에게 트로피가 수여된다. 이 과정에서 본질은 어느새 지워지고 만다.


취향의 외주화


이 기만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가공된 권위가 '객관적 사실'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작품의 각종 수상 내역은 대중의 입을 틀어막으며 지겨운 영화를 '여백의 아름다움'으로, 헛소리 가득한 노래 가사를 '은유적인 사회비판'으로 덧칠해 준다.


권위에 설득된 이들은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언론이 이를 받아쓰면서 이는 객관적 의견으로 서서히 바뀌게 된다. 과반의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이것은 고급스러운 취향이 되어버리고, 어느새 시상식에 동조하면서 시상식이 취향의 외주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시상식은 "모르겠으면 우리를 따르라."라고 외치고 대다수가 이를 따를 때 시상식의 결과는 객관적 의견이 된다.


이렇게 외부에서 만들어진 내러티브가 작품의 본질을 점령해 버린 후에는, 누가 어떻게 만든 건지조차 아무도 말하지 않게 된다. 만들어진 권위일지라도, 권위는 대중의 의심을 잠재우고 평범함을 신화로 탈바꿈시킨다. 이런 효율적인 사기의 중심에 시상식이라는 기만적 이벤트가 존재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가짜 왕관, 가짜 권위


시상식이 가지는 '예술적 권위'를 뒤집어보면 인기와 판매량을 넘어선 무언가를 만들기 위한 도전이었고 이것은 시간이 지나며 주효하게 됐다. 시상식은 고작 인기투표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환상이 깨지기 때문에 더 많은 자본들이 포장을 위해 안간힘을 뜬다. 하지만 이 결과를 거스르고 더 좋은 작품, 혹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스스로 찾는 노력을 하며 그들이 만든 틀을 깨야 한다.


시상식이 점지한 작품을 선택하는 건 타인의 선택에 자아를 매몰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자신만의 서사를 담아낸 음악과 영화를 찾고 환상이 만들어낸 권위에 매 순간 도전해야만 온전히 자신을 지킬 수 있다. 그들이 받은 트로피가 내 것이 아니듯 내가 본 작품이 선택받았다고 내가 선택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의 진짜 모습은 그것을 받아들인 후 혼자 사유하는 가운데 나타난다. 바깥의 시끄러운 찬양이나 번쩍이는 조명 아래서의 수상 소감이 아니라.


수상실적을 보지 말고 스스로의 척도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야 되는 이유다. 자본이 만든 대관식은 일종의 종교 행사 같은 것이다. 마치 신적인 존재가 위대한 작품을 점지하여 내려주는 것 같지만 그것은 당신의 선택을 강제하고 판단을 흐리면서 지적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


자본으로 범벅된 시상식의 조명이 꺼진 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들의 명작으로 올라간 제목, 그들이 찬양하는 이름들, 여기 속은 우매한 대중의 박수갈채, 끝없이 붙는 수식어들. 이것들이 없어도 작품을 좋아할 수 있었을지. 감상 후 밀려오는 감정들로부터 쏟아지는 빛이 그 작품을 환하게 비출 때 비로소 당신은 그들에게 왕관을 씌워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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