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에 갔다 오다.
습관은 흔적을 남기고, 고통의 크기와 깊이는 내 기억만큼 이었다.
단골 마트에서 받은 쿠폰으로 할인받아 수박을 샀다.
미지근한 수박은 미지근한 맥주만큼 용서할 수 없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 냉장고에 넣어두고, 충분히 시원해졌다 싶을 때 꺼냈다.
한 입 와삭 베어 물고, 오른쪽 어금니로 씹으려는 찰나,
쨍~~~ 한 통증...!!
치아를 통해서 전달된 그 통증은 뇌까지 뚫려 버릴 것 같은 고통이었다.
갑자기, 이렇게나 갑자기 이만큼이나 아플 수 있다니...
지체해선 안 된다.
시간을 끌지 말고 즉시 해결해야 한다.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낫는 감기도 아니고,
파스 붙이고 견딜 수 있는 근육통도 아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내 삶에 불리해지는, 여러모로 곤란한 고통이다.
몇 군데의 치과를 주변사람들에게서 추천을 받고, 인터넷 방문후기도 꼼꼼히 살핀 후
'과잉진료 없어요.'
'설명 잘해주십니다'
라는 후기가 주를 이루는 치과로 예약을 했다.
평일 오전이라 본인확인을 위한 간단한 절차만 원무과에서 거친 뒤 바로 시술실로 안내를 받았다
가글을 위해 세팅된 기계와 그 위에 로봇팔처럼 뻗어 있는 치과용 무영등,
그 아래에 내가 누울 시술대와 앞에 위치한 모니터가 보였다.
안내받은 시술대에 앉아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누우실게요."
라는 치위생사 선생님의 말과 함께 나의 다리는 뻗어졌고, 머리는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내 얼굴 위로 녹색의 소공(일반 손수건만 한 크기에 성인의 주먹만 한 구멍이 있는)이 덮어졌다.
그 소공은 나의 얼굴과 눈을 가리고, 입과 인중, 그리고 나의 콧구멍 일부를 아주 애매모호하게 노출시켰다.
내 오른쪽 의자에 의사 선생님이 앉으며 영혼 없는 "안녕하세요"를 주고받았다.
의자를 바짝 당겨 앉고, 장갑을 끼고, 기구를 집어드는 모든 것을 들리는 소리로 짐작할 수 있었다.
곧이어 "아~ 해보세요." 하는 말이 들렸고, 나는 최선을 다해서 입을 크게 벌렸다.
의사 선생님은 예약을 하면서 내가 가장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 오른쪽 윗니를 가장 먼저 살펴보았다.
다른 곳도 쭉 살펴보시고는 사진을 찍어보자고 하셨고, 1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앞에 있는 모니터로 내 입안의 치아들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가지런하지 않아서 놀랐다.
작은 차이이긴 하지만 높낮이가 제각각 이었다.
'저렇게.... 생겼구나, 내 치아들은. 안 예쁘네..'
조금은 흉한 내 치아를 처음 보는 타인과 함께 보고 있으니 부끄럽다는 생각도 잠시,
원장님은 내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셨다.
이러이러해서 시린 통증이 있으셨을 거고, 블라블라블라~~~
결론은, 몇 군데는 당장 시술이 필요하고 다른 곳도 곧 증상이 나타날 테니 관리 잘하시고 증상이 나타나면 바로 오세요~~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혹시 딱딱한 거 좋아하세요?
"아니요~?!"
"그럼 이빨을 꽉 깨무는 습관이 있으세요?"
딱딱한 음식을 좋아하진 않지만, 나도 모르게 이빨을 꽉 깨무는 습관은 있었다.
언제부터 왜 그런 습관이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무언가에 집중을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서 내가 꽉 깨문 치아에 긴장도 함께 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아침에 기지개를 켜면서 몸을 탁 놓을 때, 꽉 깨문 치아도 함께 탁 놓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깨닫지 못하지만 그 외 얼마나 많은 순간순간 이를 꽉 깨물었다 풀었다를 반복했었고 또 하고 있을까.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일은 아닌데도 마치 긴장된 일상을 들켜버린 듯한 나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아... 아, 그런가... 그랬나..."
원장님은 내가 그 습관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신 듯했다.
"딱딱한 음식을 즐기지 않으시면 이를 깨무는 습관은 아마 있으실 겁니다. 여기 여기 치아 군데군데 실금 같은 거 보이시죠?"
원장님은 마우스로 친절히 여러 개의 치아에 가늘게 난 스크래치 같은 자국들을 보여주셨다. 딱딱한 음식을 자주 씹거나 습관적으로 자주 이를 꽉 깨무는 경우 치아에 실금같은 균열이 생긴다고 설명해 주셨다.
"환자분은 여기,여기 또 여기.많으신데.. 치아관리에 안 좋을 수 있어요."
언제부터 왜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나의 습관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꾸준히 그들만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가장 불편한 오른쪽 윗니부터 시술하기로 했다.
시린 증상이 심해 마취를 하고 시술을 시작했다.
왼쪽에서 치위생사 선생님이 들고 있는 기계에서는 끊임없이 치익치익 소리가 났다
곧이어 원장님이 시술을 시작했다.
"윙~"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서 동시에 들리는 두 소리는
처음 느낀 시린 통증의 기억을 되살렸다.
'시리고 아플 거야, 거기서 시작된 통증은 광대뼈를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갈 거야.
그리고, 그리고 뇌가 뚫려버릴 것 같은 그 고통.. 아, 제발, 제발...'
엄지발가락이 있는 힘껏 오므려졌다.
다소곳이 올려져 있던 내 손은 앞으로 느껴질 통증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서로를 의지해 깍지를 꽉 끼었다.
온몸이 굳는 느낌이었다.
소공아래 내 얼굴은 이렇게 구겨지고 저렇게 인상 쓰고
눈썹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제멋대로 움직였다.
불안한 중에도 소공 덕분에 나의 적나라한 표정 변화들이 의료진들에게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내 표정을 봤다면 웃기기도 하고, 뭐야?라는 생각에 집중력이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시술기구가 내 치아에 와닿는 느낌, 뭔가 아련하고 둔한 느낌이었다.
다행이다.
마취약 덕분이었다.
마취약 덕분에 시린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심을 하면서도 시린 것 같은 느낌에,
시려서 아파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마취를 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아팠을 거라는 쓸데없는 짐작 때문에,
"윙~윙~, 지~잉 지~잉"
"치익~,치익~"하는 기계소리에 계속 움찔움찔했다.
치아표면을 왔다 갔다 하며 사포처럼 문지르는 것 같았다.
기구는 아마도 빠른 속도로 회전하거나 좌우로 움직이며 내 치아 위를 왔다 갔다 할 것이다.
"사각사각"
날카로운 기구를 가지고 치아와 잇몸사이를 긁어내고 있거나 다른 기구로 다른 위치라도 긁어내고 있을 것이다.
뜨고는 있지만, 제 기능은 하지 못하는 눈 덕분에 다른 모든 감각들이 열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열일을 하면서 아프면 바로 반응하기 위해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수박 한 조각이 가져온 그 시린 통증이 갑자기 공격해 오면 바로 반응을 해야 하니까 말이다.
시술을 하는 내내 시린 통증은 없었다.
마취약과, 능숙하고 숙련된 (열일했던 나의 감각들 덕분에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원장님 덕분이었다.
시술이 끝난 후 물로 가글을 했다.
물을 머금고 양볼을 움직여 입안의 물을 흔드는 동안 마취가 된 오른쪽 입술 사이로 물줄기가
삐직삐직 새어 나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프지 않게 시술 하는 동안 나의 기억이 나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했는지를 떠올리니 또 한 번 피식 웃음이 났다.
나오면서 왼쪽 윗니 시술을 위해 또 한번 예약을 했다.
다음번 치과 시술은 훨씬 덜 불안할 것이다.
오늘의 기억으로 고통의 크기와 깊이가 변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