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소요유』 - 존재와 소유
최후의 봉우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짐이 가벼워야 한다. 마지막 봉우리가 주는 희열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가벼운 신발과 송진만을 허락해야 한다. 인생은 쌓는 것 없이 달성될 수 없지만 쌓는 것만으로는 결코 삶의 가치와 본질을 실현할 수 없다.
우리는 마음의 결핍을 외면하기 위해 소유를 늘리고 외모와 이력을 관리하며 스스로를 조금씩 인정하지만, 이 만족감의 근원은 자신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활동 자체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가 오면 옷이 젖지만, 옷이 젖었다고 반드시 비가 온 것은 아니듯이 자기 계발은 소유를 낳지만 모든 소유가 자기를 실현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소유의 축적이 자신을 실현한다고 믿는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는 것을 외부의 판단에 의존하며, 이렇게 외적선이 자신을 규정한다고 믿는 순간 자신이 자신을 자신으로서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에게 사랑을 구걸하며 자기도 납득하지 못하는 인간의 존엄을 외친다.
사랑을 구걸한다는 기분은 괴로운 것이기에 우리의 절대반지인 소통과 공감의 카드를 꺼내고, 사이비 교주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하는 공감을,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군가는(나를 대하는 당신) 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 누군가는 내 앞에 당신이라는 믿음을 관철한다.
멋진 신세계를 쓴 헉슬리가 천재임은 의심할 수가 없다. 자아를 타자화하고 인격을 통장으로 가늠하는 당신은 당신을 마주한 누군가에게서 더 나아가, 실체가 없는 정부와 나의 표정 하나 직관하지 못하는 인터넷에 사랑과 공감을 강요한다.
성공적 구걸에는 역시 구걸받을 자격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 자격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타인의 기호를 파악하고 세상의 유행을 따라 신세대의 줄임말로 자신을 무장한다. 난 아직도 줄임말에 욕설을 쓰는 게 그대들이 말하는 인싸의 상징임을 단연코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이런 인싸들도 표면적으로는 한글의 독창성을 찬양하고 존경해 마지않으며 부동산에 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된다는 죄악이라는 슬로건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전면에 내세우며 동시에 시세를 확인한다.
공감에 환장한 사람은 상대의 말을 듣기 전에 나도 그걸 알고, 똑같은 아니 더 심한 경험을 당했다며 상대의 말과 표정과 감정을 지배함으로써 공감이 실천되었다는 착각을 하며,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은 구속하고 구속받는 것이 합일의 참모습이라며 상대의 이메일을 읽어보고 비밀번호를 공유하고 개인의 절대적 자유인 사상의 자유를 속박하고 취향의 상대성을 무시한다.
반대로 모든 판단을 유튜브와 샐럽, 전문성은 개똥만큼도 없는 네*버지식인, 두뇌보다 지갑이 무거운 이들에게 맡겨두고 대세와 인싸가 되기 위해, 개선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 친구의 화장품을 구입하고, 결혼식에 가기 위해 C 달린 가죽 가방을 연봉 1/3을 지불하며 구매한다. 물론 할부로.
현대인의 본질은 응당 도구적 존재로 확정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도구가 더 이상 도구가 아닌 목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텅 비어 좌망 심재하면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그런 경지가 되지 않고 비우지 말아야 할 것을 먼저 비우니 우리의 배움이 싹을 틔울 양심이 없다.
교양과 상식과 쓴소리와 신뢰, 무엇보다 자기반성과 보편성에 대한 존중과 좋은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꼰대로 치환하고, 그래프 몇 개 두고 상상력을 실상처럼 속이는 능력이 전부인, 자신이 하는 말이 무언지도 모르고 개소리나 일삼는 투자전문가들만 남겨 두니, 돈과 아파트와 자동차와 유투버 구독자 수와 주식 시세와 욕설과 남 탓, 비겁함, 노력 없는 자기 연민 등 온갖 자기기만적인 것들만 남아 우리의 텅 빈 가슴을 가득 메운다.
칸트는 인간은 공정한 것이 무엇인지를 누구나 알 수 있다고 했다. 나와 당신이 인간인 이상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존엄한 인간이라면 그 공정의 잣대는 반드시 타자뿐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채찍질해야 한다. 진부한 표현대로 우리는 남보다 나에게 관대하니까.
행복과 자기완성에 대한 고민은 영원한 숙제이지만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오랜 성찰과 고민으로도 행복은 완성될 수 없지만 우리는 유머와 교양과 논리와 지혜로 그 포괄자의 곁다리에 다다를 수는 있다.
우리는 결코 행복을 한낱 만족과 쾌락만으로 대체시켜서는 안 되고 정의와 덕을 편의주의로 환원시켜서도 안 된다. 사랑과 인간의 존엄성을 소유와 수단으로 둔갑 시킨다면 우리의 인생은 행복의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하고 궁핍한 만족감과 왜곡된 사랑을 구걸하며 자신을 자신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로, 감당치 못할 무거운 짐을 지고 암벽을 등반하는 고단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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