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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n 매거진 Jun 29. 2023

[워케이션 in 발리] 먹고 기도하고 일하라

WORKATION IN BALI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일과 쉼의 시공간 경계를 무너뜨렸다. 기존에는 일이 쉼을 침범한다는 인식이 컸지만 판데믹 기간에 벌어진 탈 오피스 실험은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다양한 기술이 등장하고 기업 문화가 변화하면서 많은 직군에 원격 근무의 길이 열렸고, 일하면서 여행하는 '워케이션'이 '워크-라이프 밸런스' 일명 '워라밸’의 화두로 떠올랐다. 디지털 노매드의 성지 발리를 찾아서 실제 워케이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취재했다. 




발리는 어떻게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워케이션 목적지가 되었을까? 


발리의 매력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발리는 동남아 관광지 중 재방문 손님이 가장 많은 도시다. 그런데 모두의 마음 속에는 저마다의 발리가 있다. 어떤 여행자는 짱구*에 머물며 아침에 조깅을 하고 오후에 서핑을 하고 저녁엔 클럽에 간다. 누군가는 '나를 찾겠다'며 우붓에서 요가, 명상, 채식을 한다. 또 누군가는 짱구의 힙스터들과 우붓의 모던 히피들이 싫다며 문둑의 청량한 정글로 숨어 들어 구도자처럼 지낸다. 걷기 좋아하는 느린 여행자들은 사누르의 차분함에 끌리고, 신혼 여행객들은 특급 호텔이 즐비한 누사두아에서 피로를 회복하면서 ‘발리 참 좋다’고 말한다. 어디로 시선을 돌리느냐에 따라 발리는 언제고 다른 도시가 된다. 그 다양성이야말로 발리의 경쟁력이다. 



전 세계 가장 인기 있는 워케이션 목적지, 발리


당신이 발리행을 선택하면 누군가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할 것이다. 요즘 발리는 너무 상업화되었다고. 하지만 그런 불평은 늘 있었다. 1980년대 발리를 방문해본 사람들은 아시아 외환 위기로 발리가 외국 자본에 함락당하고 급속히 개발되기 시작한 1990년대 말부터 고유의 매력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1990년대 발리를 겪은 사람들은 2000년대 발리가 너무 상업화되었다고 우려했다. 2000년대 여행자들은 2010년대 발리가 지나치게 세계화되었다고 낙담했다. 2010년대 여행자들은 요즘 발리 물가가 너무 오르고 교통 체증이 끔찍하다고 불평한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항상 발리에 새롭게 빠져드는 이방인들이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발리의 자연은 영성 따위 믿지 않는 건조한 여행자들조차 단 번에 압도할 만큼 강렬한 기운을 뿜어낸다. 일 보다 가족과 종교를 중시하는 발리 사람들의 태도는 삶의 속도를 돌아보게 만드는 경고등이 되어준다. 사실 발리에 오래 살면 이곳 사람들을 신비롭고 영적인 존재로 포장하는 외국 여행 서적들에 코웃음을 치게 된다. 심지어 한국 여행 책자들도 이런 서구적 오리엔탈리즘을 전시한다. 그건 마치 한중일 문화를 ‘젠'이라는 단어 하나로 퉁치려 드는 거나 마찬가지다. 인도네시아 코믹 액션 영화 <더 빅 4(the Big 4, 넷플릭스)>를 보면 이런 외국인들의 착각을 이용해 넝마를 입고 명상 센터를 운영하며 콤부차를 신비의 전통 영약이라고 비싼 값에 팔아먹는 전직 킬러가 등장한다. 그 장면에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는 건 이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발리도 여느 도시들처럼 다양한 성격과 가치관을 가진 현대인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다. 힐링은 이곳에서 가장 성공한 ‘산업'이다. 발리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이미지로 대상화되는지도 안다. 외지인들이 발리를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고 느끼는 건 발리가 관광 산업에 의존하는 곳이라 로컬과 외지인에게 다른 규범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발리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보편적 장점들이 있는데, 그건 바로 호기심이 많고 모험심이 강하고 친구 사귀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타인을 대할 때 한국 사람들의 기본값이 경계심이라면 발리 사람들의 기본값은 친절이다. 호스트의 이런 태도는 여행자들의 심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발리에서 우리는 조금 더 느긋해지고, 로컬이건 여행자건 우리 곁의 타인에게 더 쉽게 말을 걸 수 있다. 이곳에 들른 이방인들은 심신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는 말을 자주 하고, 나아가 이곳을 제2의 집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여기에 지극히 현대적인 면모가 섞여든다. 


인도네시아는 투자 이민이 쉬운 나라다. 발리의 상업 시설도 대부분 외국인이 소유하고 있다. 싫건 좋건 그로 인해 발리는 전 세계 여행 트렌드를 가장 먼저 반영하는 도시가 되었다. 발리 번화가의 상점, 호텔, 빌라들은 핀터레스트 실물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현지어 한 마디 못해도,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도, 이곳을 여행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전기, 수도, 대중 교통, 도로, 쓰레기 처리 시스템 등 기간 시설은 뒤쳐졌지만 핀테크 기반 공유 경제는 어느 대도시보다 발달했다. 발리의 매력에 빠져 장기 체류하는 이방인이 많다 보니 흥미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쉽다. 한때 유명 화가, 정원사, 뮤지션 등이 ‘제2의 고향’이라 부르던 발리는 이제 힐링, 자기계발, 온라인 비즈니스, 레저 스포츠, 식도락, 패션, 친환경 건축 스타트업의 고향이 되고 있다. 작가, 프로그래머, 그래픽 디자이너 등 디지털 노매드에 적합한 프리랜서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해 타바난, 울루와뚜, 누사 페니다 등 외곽으로 흩어지는 추세지만 여전히 발리를 지키고 있다. 


물가 상승에도 여전히 일하며 살기좋은 도시

 

판데믹 이후 급속한 인플레이션은 발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발리 번화가의 숙박, 외식, 쇼핑, 시장 물가는 체감상 판데믹 전보다 20~30퍼센트 상승했다. 하지만 발리 여행객 국적 다수를 차지하는 호주, 동아시아, 유럽의 물가도 그만큼 올랐다. 그러니 인터넷을 이용해 선진국과 일하며 그곳 수준으로 비용을 지급 받는 사람들에게 발리는 여전히 ‘일하며 살기 좋은 도시’다. 많은 장기 체류자들이 이런 이유로 발리를 택한다. 서울, 런던, 파리, 뉴욕에서 스튜디오 한 칸 간신히 구할 돈으로 이곳에서는 수영장 딸린 독채 빌라에 살면서 주말마다 서핑과 요가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온 온라인 마케터 크리스티나 역시 ‘삶의 질’을 첫 번째 이주 목적으로 꼽았다. 그는 처음에 우붓에 정착했다가 2019년 울루와뚜로 옮겼다. “거기가 우붓보다 한적하고 빌라 렌트비도 저렴했다. 온라인으로 일을 하면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해서 가외 수입을 올리기로 했다. 서핑 해변이 가깝다는 것도 좋았다. 내 수입으로 호주에선 꿈도 못 꿀 생활이다. 가족들은 돌아오라고 말하지만 이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프랑스 게임 애니메이터 듀크는 이렇게 말한다. “대도시에 살 때는 돈을 벌어서 생활비로 다 썼다. 생활비가 많이 드니까 일도 더 많이 해야 했고. 워라밸은 꿈꿀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돈을 벌려고 돈을 쓰고, 쓴 돈을 메꾸려고 다시 돈을 버는 쳇바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2017년 발리에 왔다. 발리에서 유일한 단점은 인터넷이다. 화상 회의 정도는 괜찮은데 게임 애니메이션처럼 고용량 파일을 전송하려면 어쩔 수 없이 번화가에 살아야 한다.” 그는 전 세계 애니메이터들의 성지인 일본에서 일하기를 오래 꿈꾸었는데, 2019년 발리를 떠나 일본으로 갔다가 6개월만에 돌아왔다. “물가도 물가인데, 동아시아는 다른 인종에게 배타적인 정서가 있더라. 발리는 다양한 국적, 인종이 뒤섞여 있고 로컬들도 외부인에 포용적이라 생활하기 편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도네시아에도 인종 차별은 존재한다. 단일 국가로서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시작되었고, 그 전까지는 섬마다 다른 왕조와 신을 섬기고 다른 언어를 쓰는 부족들이 있던 나라다. 아체, 파푸아 등에서는 지금도 인종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외국인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알비노를 뜻하는 ‘불레’라는 호칭은 백인을 부르는 멸칭으로 사용되다가 백인들이 자조적으로 순응해버려서 일상어가 되었다. 그럼에도 발리는 워낙 외국인 거주자가 많아서 개개인에 이목에 집중되지 않는다. 발리에서는 특히 한국에 호의적인 사람들을 만나기 쉽다. 한류의 영향이다. 현지 넷플릭스 드라마 순위를 보면 1위에서 10위까지 중 항상 7~8편은 한국 드라마다. 슈퍼마켓마다 놓인 인형 뽑기 기계들은 하루 종일 한국 동요를 쏟아내고, 어린이들은 <타요>를 보며 밥을 먹는다. 골목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외치며 뛰어노는 아이들, 케이팝의 한국어 가사를 유창하게 따라하는 청소년, 한국인이라면 반색하는 드라마 팬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다. 유럽에서 온 어느 여행자는 인도네시아의 K-드라마 팬과 대화를 하고 나서 이렇게 전했다. “그는 마치 성공한 친척 자랑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서양을 동경하지 않는다. 아시아가 더 쿨하다’는 뉘앙스였다.” 


최고의 환대를 누리기 위해 기억할 것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도시에서 우리는 언제까지고 손님이라는 사실이다. 관광지에는 외국인이 다수고 현지인은 종업원으로만 만나니까 발리에 오는 여행자들은 흔히 자기가 이 섬의 주인인양 착각한다. 하지만 발리는 엄연히 이슬람 국가의 한 도시고, 이 나라에는 오랜 군부 독재의 잔재인 강력한 명예훼손 법이 남아 있으며, 이민국과 경찰의 힘도 막강하다. 힌두 사찰에서 난잡한 사진을 찍거나, 해변이 아닌 곳에서 비키니를 입고 돌아다니는 식의 방종을 예전에는 웃어 넘겼다. 하지만 판데믹으로 현지인들이 고통받을 때도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불만이 커졌다. 최근에는 지역 정서에 반하는 행위를 소셜 미디어에 전시했다는 이유로 외국인을 추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때문에 한국 대사관은 연일 현지 문화를 존중하라는 메시지를 낸다. 

장기 여행자들은 흔히 개발도상국에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켜 로컬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주범으로 지목받는다. 발리는 그 영향이 극도로 가시화된 곳이다. 휴양지에 와서 돈을 펑펑 쓴다고 해서 그게 시혜는 아니라는 소리다. 발리로 워케이션을 떠난다면 당신도 미필적 고의로 여기 가담하게 된다. 때문에 발리를 사랑하여 오래 머물고픈 이방인들은 의식적으로 로컬들과 어울리고, 현지에서 현지인에 의해 생산된 상품을 우선 소비하고, 작은 가족 사업과 지역 공예가들을 후원하고, 봉사와 기부에 참여하는 등 ‘좋은 시민’이라는 제스처를 보이는 데 적극적이다. 이건 ‘워케이션’을 꿈꾸는 중단기 여행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발리는 아름답고 관대하고 자유로운 곳이다. 하지만 그것을 충분히 누리기 위해서는 이 사회를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태도가 필수다. 당신이 기꺼이 맞이하고 싶은 손님이 될 때 그들은 세상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환대를 보여줄 것이다. 

 



편집자 주) Canggu. 외래어 표기법 때문에 한국 미디어는 ‘캉구’라고 표현하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c’를 ‘ㅉ’로 읽는다. 발리에서 ‘캉구’라고 발음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 비합리적인 외래어 표기법 때문에 한국 여행자들은 전통 미디어에서 발리 정보를 찾을 수 없어 개인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는 지명에 한해 외래어 표기법과 현지 발음의 차이가 클 경우 현지 발음대로 표기해 실용성을 높였다. 




ㅣ 덴 매거진 2023년 7월호
글 이숙명(작가, 발리 거주) 
에디터 이영민(min02@mcircle.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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