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의 혁신과 당국의 신중함 사이에서 한국의 디지털 통화 주권이 걸린 길찾기가 시작됐다.
최근 국내에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금융당국과 한국은행 간의 시각차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관련 법안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각 기관의 이해관계와 규제 철학이 엇갈린 데다 외국환거래법 등 기초 법률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 많아 제도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한국은행의 신중론은 스테이블코인이 국가 경제에 미칠 수 있는 광범위한 영향을 고려할 때 결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지점을 적시하고 있다.
통화정책 유효성의 저하는 가장 핵심적인 우려다. 스테이블코인이 대규모로 보급될 경우, 한국은행이 금리 등 전통적인 금융정책 수단을 통해 통화량과 유통속도를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물가 안정 등 한국은행의 핵심 임무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지급결제 시스템 신뢰 훼손 가능성도 거론된다. 원화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이 실질적인 지급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을 경우, 한국은행이 운영하는 대국민 결제 인프라의 안정성과 신뢰도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다.
한국은행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이 화폐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통화정책, 자본자유화 등 거시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금융안정성 위협 역시 중요한 우려 사항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부실해지거나 대규모 환매 요구를 감당하지 못할 경우, 이는 신용경색을 불러와 금융 시스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 테라·루나 사태는 이런 우려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한국은행은 "USDT, USDC 등 주요 스테이블코인이 스테이블하지 않은 사례뿐만 아니라, 최근 PYUSD 스테이블코인이 내부 시스템 오류로 인해 준비자산 없이 무려 300조 달러 규모의 스테이블코인이 잘못 발행되는 사고가 있었음"을 지적하며 기술적 결함 가능성을 경고했다.
외환 규제 및 불법자금 유통 문제도 안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익명성과 국경을 초월한 이전의 용이성은 자본 이동 규제를 회피하거나 불법자금을 이동시키는 데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자본시장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다수의 개인들이 외환시스템을 우회하여 신속하고 간편한 방법으로 국경간 이전거래에 가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 외환정책과의 정합성 제고 방안을 서둘러 마련할 필요가 있다.
현재 국회에는 스테이블코인과 관련해 총 7개의 가상자산 관련 법안이 계류 중이다. 이들 법안을 가로막는 주요 쟁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행 대 비은행 갈등은 가장 첨예한 대립점이다.
민병덕 의원은 "은행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대해 동의하지만, 은행만 발행한다면 기득권의 잔치가 될 것"이라며 "혁신기업이 '메기' 역할을 할 수 있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지 않으면 결국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지급결제수단이 되어서 몇 년 뒤엔 달러 스테이블코인이나 다른 나라의 스테이블코인이 민간에 통용되고, 우리는 통화주권을 잃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한국은행은 "은행이 스테이블코인 발행의 주체가 되거나, 은행이 발행 등 주도적 역할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은행권 중심의 컨소시엄을 통해 발행을 추진한다면 앞서 언급한 문제들의 상당 부분이 현행 규제 체계에서 관리될 수 있음"이라고 반박한다.
준비자산 관리와 자기자본 요건을 놓고도 의견이 대립한다. 한국은행은 발행사 인가, 발행량 및 준비자산 구성과 같은 주요 사항은 "유관부처 간 합의 기반의 법정 정책협의 기구를 설치하고 동 협의기구에서 논의하여 결정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해외 스테이블코인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확장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시장연구원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성패를 좌우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글로벌 확장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므로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에 대한 국제적 신뢰 구축과 더불어 원화 국제화를 통한 다양한 원화수요 기반 확대가 긴요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지적한다.
실생활 활용처 확대가 시급하다. 현재 스테이블코인은 그 거대한 시장 규모에도 불구하고 실생활에서 쓰이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에 따르면 작년 스테이블코인 거래규모는 약 26조 달러를 넘었지만, 대부분은 가상자산 거래소 내 거래로 활용됐다. 결제 목적 등으로 거래된 스테이블코인 거래 규모는 전체의 6% 안팎에 불과하다.
해외 사례에서 배울 점이 많다. PYUSD는 페이팔의 광범위한 사용자 기반과 결제 인프라를 활용해 성장했고, FDUSD는 바이낸스의 런치풀에 도입되며 사용자와 유동성을 빠르게 확보했다.
USDG는 글로벌 달러 네트워크를 통해 여러 나라의 서비스들이 USDG를 채택할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활용처를 늘린 모범 사례이다.
반면 EURCV(소시에테 제네럴 발행)나 JPYC(일본)와 같은 스테이블코인은 제한된 활용처로 인해 시가총액이 각각 4,600만 달러, 1,500만 달러에 그치고 있다.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테더(USDT) 등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80% 이상을 점유하며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이 이 시장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관 간 이해관계 조정에 매몰되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최소한의 안전장치 아래 시장의 혁신을 믿고 출발해야 한다.
단계적 접근이 현실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 한국은행이 제안한 대로 "시중은행부터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한 뒤 점진적으로 핀테크 등 민간 비은행 업체로 확대해 나가는"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동시에 민간 혁신을 위한 실험의 장을 열어두는 균형이 필요하다.
이미 금융당국은 가상자산 대여 서비스와 같은 파생 영역에서 디지털자산거래소 공동협의체(DAXA)의 자율 규제를 임시로 허용하며 시장 스스로 질서를 잡아가는 모델을 시험 중이다.
이는 규제 당국이 시장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역할을 사전 규제에서 사후 모니터링과 감시로 전환하는 현명한 접근법이다. 스테이블코인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은 실시간으로 시장 데이터를 공유하고, 이상 징후를 공동으로 점검하며, 필요시 함께 개입하는 '공동 모니터링' 체계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향한 한국의 여정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와 송치형 두나무 이사회 의장이 보여준 협력적 접근처럼, 민간의 혁신 정신과 공공의 안정성 추구가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디지털 통화 주권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일본이 이미 엔화 스테이블코인을 승인하고 동남아시아에서 '엔화존' 구상을 추진 중이며, 미국은 지니어스 법안을 통해 달러 패권 강화에 나서는 상황에서 한국만 주저하고 있을 수 없다.
혁신과 안정 사이에서 균형 잡힌 길을 찾는 것이야말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진통 속에서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일 것이다.
자료 참조: MK 자본시장연구원 한국은행 에너지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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