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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빛이 머물던 자리

도봉산의 늦가을에서

by 시니어더크
2018.11.3 도봉산에서


토요일, 하루 종일 하늘이 잿빛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낮게 깔린 구름은 세상의 숨소리마저 잠재우는 듯했고, 바람은 느리게 흘렀다. 햇살 한 줄기 비추지 않는 회색의 공기 속에서도 이상하리만큼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떠난 이의 숨결이 계절의 바람 속에 스며든 듯했다.


이른 아침부터 마음이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창문을 열자 싸늘한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고, 그 속에 낙엽 냄새가 섞여 있었다. 땅 위에는 지난밤바람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덧없이 포개져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오래된 기억 한 조각처럼 느껴졌다.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바람은 조용히 시간의 가장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이 계절의 바람은 늘 익숙한 그리움을 데려온다. 손끝에 닿는 공기마저 낯설지 않은 건, 그 안에 누군가의 온기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떠난 이가 남겨놓고 간 체온은 아직 내 삶의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살아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따뜻함이다.


잠시 창가에 서서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 구름 사이로 빛이 비집고 들어올 듯 말 듯 머물렀다. 그 순간, 오래전 들었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스쳤다. "괜찮아요." 그 말 한마디가 무게 없는 공기처럼 내 가슴을 두드렸다. 눈을 감자 그리움이 서서히 번져, 온몸이 고요해졌다.


2025.11.8 도봉산


삶이란 어쩌면 이런 순간들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사라진 것들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온기를 발견하는 일. 그리고 그 온기가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는 일.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지만, 그 속 어딘가에는 분명 미세한 빛이 숨어 있었다. 마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도 꺼지지 않은 불빛처럼.


이런 날엔 마음이 쉽게 젖는다. 창밖의 빛이 희미해질수록 내 안의 그림자도 길게 드리워진다.

방 안에는 정적이 깃들고,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마저 멀게 느껴진다. 세상은 고요한데, 마음 한 편에서는 오래된 파문 하나가 조용히 번져간다. 구름 사이로 잠시 스며든 빛 한 줄기, 그 찰나의 순간에 오래 전의 미소가 겹쳐졌다. '괜찮아요.' 그 목소리가 공기 속에 남아 있는 듯했다. 눈을 감으면 가까워지지만, 다시 뜨면 이미 사라져 있다. 빛이 지나간 자리엔 오직 그리움만이 남는다.


계절은 변함없이 돌아오는데, 마음의 시계는 어느 날의 오후에 멈춰 있다. 병실의 흰 천장, 기계의 고른 숨소리, 그리고 창밖으로 스며들던 겨울 햇살. 그때의 공기와 온기가 아직도 내 어딘가에서 살아 있다. 세월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한 장의 장면처럼, 내 마음속 한 구석에는 여전히 그날의 온도가 남아 있다.


문득 그날의 창밖을 떠올린다. 유리창에 반사된 햇살이 흰 벽을 따라 흔들리고, 하얀 커튼이 바람에 살짝 들썩이던 순간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손을 꼭 잡았다. 그 손의 온기가 아직도 내 손끝에 남아 있는 듯하다. 계절은 바뀌어도, 그날의 빛과 온기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 마치 시간 속에서 조용히 숨 쉬는 기억처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따뜻하게 살아 있다.


2025.11.8 도봉산


내일 오전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하늘은 회색빛을 거두지 못한 채 묵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사연 하나를 가슴속 깊이 품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내일 내릴 그 비는 이별의 눈물이 아니라, 남은 자의 그리움을 닮은 인사일지도 모른다. 떨어질 빗방울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이 실리고, 그 물길은 길 위를 적시며 천천히 흘러가겠지. 비 내린 뒤의 거리에는 언제나 지난 시간이 스며 있고, 그 시간은 어김없이 한 사람의 이름으로 젖어든다.


그때 문득 한 곳이 떠올랐다. 창덕궁 비원. 오래된 담장과 고요한 연못, 그리고 붉게 물든 단풍. 그곳을 떠올리자 그 사람의 웃음이 함께 떠올랐다. 단풍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얼굴을 비추면, 그 미소는 연못 위에 퍼지는 잔물결처럼 고요하고 따뜻했을 것이다. 그 잎을 바라보며 '참 예쁘다'라고 속삭이던 목소리가 바람을 따라 귓가에 스민다.


예매창을 열었지만, 이미 표는 모두 매진이었다. 가지 못하는 길이라 해도 마음의 발걸음까지 멈출 순 없었다. 대신 마음속으로 천천히 그 길을 걸었다. 돌계단 위로 소복이 쌓인 낙엽이 바스락거리고, 은행잎 사이로 부딪히는 바람의 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도 세상은 살아 있었고, 그 소리 하나하나가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 모든 장면 속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발소리가 겹쳐 들렸다. 함께 걸었던 기억의 발자국은 시간의 먼지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미소와 숨결이 여전히 그 길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가지 않아도 이미 그곳은 내 안에 있었다. 눈을 감으면 오래된 담장 너머의 풍경이 펼쳐지고, 연못 위로 단풍잎 한 장이 천천히 떨어졌다. 마음속의 비원은 언제나 그 이름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붉은빛은 지금도 내 안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2001811.3 도봉산에서


결국 발길은 도봉산으로 향했다. 창덕궁 대신 선택한 그 길은 낯설지 않았다. 2018년 늦가을, 그녀와 함께 올랐던 산자락.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지던 햇살, 공기 속에 배어 있던 낙엽 냄새, 그리고 "이 단풍색 참 곱다" 하며 웃던 얼굴이 눈앞에 선명했다. 그날의 도봉산은 단풍보다 따뜻했고, 햇살보다 포근했다. 그 웃음은 산의 바람 속에 스며들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날 찍은 사진이 있다. 오래된 앨범 속이 아니라, 늘 손에 닿는 휴대폰 속의 몇 장의 사진. 화면을 켤 때마다 붉은 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처럼 그 미소가 되살아난다. 햇살에 눈을 가늘게 뜬 얼굴, 바람에 흩날리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생생하다. 그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의 흐름이 잠시 멈춘다. 그날의 공기와 냄새, 발밑의 낙엽소리까지 함께 되살아난다. 마치 오래 잠들었던 기억의 문이 살짝 열리고, 그 안에서 부드러운 바람 한 줄기가 흘러나오는 듯하다.


올해의 도봉산은 조금 달랐다. 낙엽은 여전히 사각사각 발밑에서 속삭였지만, 그 발자국을 따라 걷는 이는 이제 나 혼자였다. 함께 걷던 길은 그대로인데, 길의 온도가 달라져 있었다. 산은 변함없이 서 있었지만, 그 풍경 속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는 바람에 묻혀 멀리 흩어졌다. 남은 단풍은 마지막 빛을 내며 가지 끝에 매달려 있었고, 그 색은 사라지기 전의 미소처럼 애틋했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나뭇잎 하나를 흔들었다. 그것이 마치 손끝처럼 느껴졌다. 다가가면, 그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 것만 같았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그 순간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2018.11.3 도봉산에서


산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 속에는 환한 기쁨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을 적시는 그리움의 색이 번져 있었다. 바람은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부드럽게 지나갔고, 그 소리마저 오래된 노래처럼 들렸다. 나무 한 그루, 낙엽 한 장마다 시간이 묻어 있었다. 한때 함께 바라보던 풍경이 이제는 나 혼자서 기억해야 할 장면이 되어 있었다.


산길을 내려오며 나는 오래된 장면들을 하나씩 꺼내 보았다. 손에 쥔 커피잔의 온기, "조심해요" 하던 다정한 목소리, 그리고 마주 보며 웃던 눈빛의 온도. 그 모든 순간이 바람을 타고 되살아났다. 낙엽이 흩날릴 때마다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바람이 잠시 멎을 때면 그 온기가 내 어깨 위에 닿는 것 같았다. 지나간 시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렇게 또 다른 형태로 내 곁을 맴돌고 있었다.


눈가가 어느새 젖었다. 하지만 그 눈물엔 슬픔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리움의 끝에는 늘 고마움이 따라왔다. 함께했던 시간이 얼마나 귀한 선물이었는지, 지금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사람의 기억은 그렇게 늦게 익어간다. 세월이 흘러도 그때의 온기는 식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고 단단해져, 마음의 안쪽에서 천천히 빛을 낸다.


그날의 도봉산은 내 품으로 다시 돌아온 듯했다. 나무와 바람, 낙엽과 빛이 모두 하나의 감정으로 엮여 내 안에서 살아났다. 산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은 텅 비어 있지 않았다. 그리움이 그 자리를 가만히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품 안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바람이 다시 불어와 낙엽을 흩날릴 때, 그리움은 조용히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그것은 눈물보다 따뜻했고,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위로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잿빛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하루 종일 무겁던 하늘이 잠시 틈을 내주듯, 그 빛은 조심스레 어둠을 비집고 나왔다. 고요한 도로 위로 부서지듯 내려앉은 그 빛이 내 얼굴에 닿는 순간,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단순한 햇살이 아니었다. 오래된 인연이 내게 손을 내미는 듯한 따스한 감촉이었다


"나 여기 있어요." 그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흘러왔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잿빛 구름은 여전히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 속에서 분명히 미세한 빛이 숨 쉬고 있었다. 나는 그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알아요. 당신은 아직 내 안에 있어요."


그 순간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따뜻해졌다. 오래 묵혀 있던 그리움이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떠난 이의 부재보다,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있는 존재감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가 남긴 숨결은 아직 내 일상 속에 남아 있었다. 아침의 첫 햇살, 저녁의 바람, 낙엽이 스치는 소리 하나에도 그의 흔적이 있었다.


그는 이제 삶의 바깥이 아니라 내 안의 시간으로 남아 있다. 눈을 감으면 그 미소가 떠오르고, 이름을 부르면 그리움이 대답한다. 모든 풍경이 그를 닮아가고, 모든 계절이 그를 품고 있다. 언젠가 세상이 다시 봄빛으로 물들 때, 나는 오늘의 이 빛을 떠올릴 것이다.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살아 숨 쉬는 사랑의 증거다.


2025.11.8.도봉산


내일은 아이들과 함께 그녀를 다시 찾을 것이다. 일 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 길은 여전히 그리움의 냄새로 가득할 것이다. 손에는 하얀 꽃 대신 화사한 꽃다발을 들고, 그가 사랑하던 하늘 아래 서서 두 손을 모을 것이다. 꽃잎마다 그의 미소를 담듯, 아이들의 손끝도 조심스레 떨릴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침묵 속에서도 마음은 분명하게 통할 테니까.



비가 온다면 그것은 이별의 눈물이 아니라 오랜만의 인사일 것이다. 하늘이 대신 전하는 반가움의 손짓, 혹은 그가 남긴 따뜻한 안부일지도 모른다. 빗방울이 이마에 닿을 때마다, 그는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갈 것이다. 오후가 되어 구름이 걷히면, 분명 투명한 하늘빛이 드러날 것이다. 그가 사랑하던 하늘, 그가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던 빛.


나는 그 하늘 아래에서 다시 조용히 속삭일 것이다. 그날의 단풍빛처럼, 그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가장 고운 빛으로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도 그 빛은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고 잔잔하게 내 삶의 틈새를 비춘다. 세상의 모든 계절이 지나도 그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봄의 연둣빛에도, 여름의 녹음에도, 겨울의 첫눈 속에서도 그 색은 단풍처럼 따뜻하다.


그리움은 바람이 되고, 바람은 다시 빛이 되어 내 안에서 끝없이 이어진다. 그렇게 그는 여전히 나와 함께 걷고 있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이 세상 어디에서든 내 마음의 하늘 아래 그는 살아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 빛은 언젠가 나를 데려가 다시 그 곁으로 닿게 할 것이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다시 한번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빛 속에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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