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로 건너간 하루

로마를 떠나 베네치아와 부라노의 색 앞에 서다

by 시니어더크


하룻밤이 지나자 몸의 피로가 거짓말처럼 걷혀 있었다. 낯선 나라에서 새로운 풍경을 눈에 담는 일은, 생각보다 사람을 오래 지치게 두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드디어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떠나는 날. 고대의 시간 위에 현재가 겹겹이 내려앉은 로마를 뒤로하고 우리는 3박 4일 머물렀던 숙소를 정리했다. 아들과 딸, 그리고 나, 세 사람은 각자의 캐리어를 끌며 테르미니역으로 향했다.


플랫폼 어딘가에서는 베네치아행 기차 이딸로가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로마를 완전히 떠난다. 지금 이 순간을 지나면, 이 도시로 다시 돌아올 날이 과연 또 있을까. 칠순을 기념해 아이들과 함께 나선 이번 여행이어서인지, 오늘의 출발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시간의 한 문을 조용히 밀고 나서는 일처럼 묵직하게 다가왔다.


테르미니역 카페

테르미니역에 도착했을 때, 전광판에는 아직 우리가 탈 기차 번호가 떠 있지 않았다. 예상보다 이른 도착이었는지 시간적 여유가 제법 있었다. 서두를 이유도, 마땅히 머물 곳도 없어 우리는 역 안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빵과 향긋한 에스프레소를 주문해 놓고 출발 시각에 맞춰 천천히 시간을 맞춰갔다. 빵의 일부는 기차 안에서 먹을 생각으로 따로 봉투에 담아 두었다.


로마에 와서 나보나 광장에서 처음으로 마셨던 그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과 맛이 아직도 입안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일까. 어느새 나 자신도 모르게 그 깊은 풍미의 애호가가 된 듯,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같은 커피를 다시 주문했다.


우리 좌석은 모두 1인석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나는 딸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고, 아들은 그 옆줄 다음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좌석 간 간격은 생각보다 넉넉했고, 막 출발한 열차의 창밖으로는 로마의 고대 유적들이 느린 장면처럼 하나씩 뒤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딸로 고속철도 1등석

나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 위로, 어느 순간 지난 70년의 세월이 겹쳐 떠올랐다가 다시 조용히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문득, 38년 동안 내 곁을 지켜주던 아내의 모습도 차창 너머 어딘가에 서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열차는 멈추지 않았고, 우리의 시간 역시 조용히 다음 도시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약 4시간 가까이 달린 끝에 우리는 마침내 베네치아 본섬에 도착했다. 열차가 멈춰 선 곳은 이 도시의 유일한 철도 종착역인 '베네치아 산타 루치아역'이었다. 역사 문을 빠져나오는 순간, 눈앞에는 곧바로 대운하의 물빛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플랫폼의 금속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물 위의 도시가 먼저 우리를 맞이한 셈이었다.


선착장에는 여객선들이 낮게 기적을 울리며 정류장에 붙었다가 다시 미끄러지듯 물살 위로 떠났다. 차 대신 배가 오가고, 도로 대신 물길이 흐르는 풍경은 분명 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다른 현실의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베네치아 본섬 안에서의 교통수단은 오직 배뿐이다. 이곳 사람들은 그것을 수상버스, 혹은 수상택시라 불렀다.


수상버스 티켓

우리도 표를 끊어 수상버스에 몸을 실었다. 배가 부두를 벗어나자, 양옆으로 늘어선 건물들이 물결에 흔들리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물 위를 가른다는 감각이 이렇게 또렷할 줄은 미처 몰랐다. 아이들과 나는 말수가 잠시 줄어든 채, 각자 다른 방향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얼마쯤 흘렀을까. 배에서 내려 해안을 따라 한 참을 걸어가자 골목이 나타났고, 몇 번 더 방향을 꺾자, 시야가 갑자기 넓어지며 거대한 공간이 한 번에 열렸다. 그곳이 바로 베네치아의 심장이라 불리는 '산 마르코 광장'이었다.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물의 도시가 품고 있던 시간이 비로소 한눈에 펼쳐지는 듯했다. 수많은 발걸음이 스쳐 간 돌바닥 위로, 여행자의 시간도 조용히 그 위에 겹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 산 마르코 광장은 다음에 천천히 살펴보기로 마음을 접어 두고, 우리는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뒷골목 숙소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베네치아 숙소 현관문

우리가 묵을 숙소는 4층이었다. 그런데 막상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치 못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었던 것이다.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건장한 아들이 먼저 나서 짐을 하나씩 들고 계단을 올랐다. 딸과 나는 뒤에서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살짝 붙들어 주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아들의 힘에 기대어 우리는 무사히 4층까지 짐을 모두 옮길 수 있었다.


이 숙소는 아들이 직접 골랐다고 했다. 건물의 꼭대기 층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주방 밖으로 이어진 베란다가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했다. 그곳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커피를 올려놓고 내려다보는 풍경이 무척 좋다며,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짐을 들어 올린 수고쯤은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간단히 저녁을 차려 먹은 뒤 커피를 들고 베란다로 나가 보니 베네치아의 밤 풍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물 위의 도시가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으로 숨 쉬고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일 아침에는 또 얼마나 황홀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마음이 한껏 들뜨는 듯했다.


숙소에서 만들어 먹는 저녁식사

저녁상은 숙소 근처의 작은 상점에서 사 온 음식으로 소박하게 차렸다. 본격적인 요리는 내일 부라노 섬을 다녀온 뒤, 오후에 본섬 밖 대형마트에 들러 재료를 장만해해 먹을 계획이다. 그렇게 우리는 커피 한 잔의 온기를 사이에 두고, 베네치아에서의 첫 밤을 조용히 맞이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베란다로 나가 보니, 어젯밤 내려다보았던 베네치아의 풍경이 아침빛 속에서 또 다른 얼굴로 펼쳐지고 있었다. 물의 도시라는 낯선 환경이 조용하면서도 분명한 울림으로 마음을 두드렸다.


사실 나는 수영을 못한다. 그럼에도 건물 사이로 흐르는 물길과 잔잔히 숨 쉬는 바다는 이상할 만큼 평화롭게 느껴졌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평생 택시를 탈 일이 거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베네치아 골목

특히 이곳 베네치아, 그러니까 베니스는 세계적인 영화제로도 잘 알려진 도시다. 우리가 오기 몇 달 전에도 이곳에서는 영화제가 열렸고, 우리나라 배우들 역시 여럿 다녀갔다고 했다. 화려한 레드카펫이 펼쳐졌을 그 시간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고요한 아침 사이에는 묘한 시간의 간격이 느껴졌다.


우리는 서둘러 간단한 가방만 메고 숙소를 나섰다. 수상버스가 기다리는 정류장까지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었다. 물의 도시를 처음 온몸으로 느끼는 길이었기에, 서두르기보다 천천히 눈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골목 사이로 스며든 물빛과 오래된 벽면의 색감, 창가에 걸린 작은 화분들까지도 모두 낯설고 또렷하게 다가왔다.


부라노섬으로 배타러 가는 골목길

책과 화면 속에서만 보아 오던 베네치아의 실체를 실제로 걷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더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다. 지도 위의 도시가 아니라, 발바닥으로 밟히는 현실의 공간이라는 감각이 걸음마다 새롭게 전해졌다.


가는 길에는 그 유명한 리알토 다리도 건너게 되었다. 다리 위에는 이미 수많은 여행자들이 모여 있었고, 난간 너머로 펼쳐진 대운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모습들이 이어졌다. 우리 역시 잠시 걸음을 늦추어 물 위를 오가는 배들을 내려다보았다. 베네치아가 왜 물의 도시라 불리는지, 그 말의 무게가 비로소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선착장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긴 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와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듯했다. 형형색색의 옷차림과 서로 다른 언어가 뒤섞인 줄의 끝에 우리도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부라노 섬으로 향하는 여행자의 표정에는 어딘가 비슷한 기대가 어려 있었다.


부라노섬 가는 수상버스

잠시 후 수상버스가 낮은 엔진음을 내며 부두에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승객들이 차례로 배에 오르기 시작했고, 우리도 흐름에 맞춰 선실 안으로 발을 옮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창밖의 물빛이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배가 부두를 천천히 밀어내며 출발하자, 베네치아 본섬의 건물들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물 위에 길게 번지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니, 우리는 어느새 또 하나의 섬, 부라노를 향해 조용히 나아가고 있었다.


부라노섬 부두앞 잔디밭

약 사십 분쯤 물길을 가르며 달린 끝에, 수상버스가 서서히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자 부라노 섬의 선착장이 눈앞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배가 부두에 닿을 즈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선착장 앞에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밭이었다. 물과 돌, 그리고 오래된 건물의 색감에 익숙해질 무렵이었기에, 그 싱그러운 초록은 의외의 장면처럼 신선하게 다가왔다.


형형색색의 건물들

그리고 그 너머로, 마침내 부라노의 진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운하를 따라 또렷하게 늘어서 있었다. 붉은색과 노란색, 파스텔빛의 분홍과 초록이 서로 밀리지도 흐려지지도 않은 채, 또박또박 자기 색을 내고 있었다. 사진으로는 여러 번 보았던 풍경이었지만, 실제로 마주한 색의 밀도는 전혀 다른 깊이로 다가왔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물 위에 비친 집들의 색이 잔잔한 물결에 흔들리며 또 하나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이들 역시 말수가 줄어든 채, 각자의 시선으로 이 낯선 색의 마을을 바라보며 조용히 셔터를 눌러 담고 있었다.


부라노섬

천천히 골목 안으로 발을 들이려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 섬은 서둘러 지나갈 곳이 아니겠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부라노의 색은, 조금 더 천천히 마주해야 할 것 같았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