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를 넘어 처음 만난 스위스

베네치아를 떠나 스위스 산골 마을에서 맞은 첫날의 종소리

by 시니어더크


2025년 10월 11일.
나는 5박 6일 동안 이어졌던 베네치아 여행을 마치고 이탈리아를 떠나 알프스 산맥을 넘는 길에 올랐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 두었던 나라, 스위스를 향해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숙소에서 나와 베네치아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수상버스를 타고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공항으로 갔다. 약 40여 분 후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보안 검색을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공항 2층에 있는 라운지로 올라갔다. 창밖으로는 베네치아의 라군 위에 아침 햇살이 잔잔히 번지고 있었고, 여행객들은 조용히 커피와 간단한 식사를 즐기며 각자의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그곳에서 잠시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과 가벼운 아침 식사를 하며 숨을 고르듯 시간을 보냈다. 공항 라운지는 처음 들어와 보는 곳이었지만, 여유가 된다면 이런 라운지에서의 휴식도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는 동안 며칠 동안 이어졌던 이탈리아 여행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천천히 지나갔다. 로마의 오래된 유적지 거리와 포지타노의 푸른 바다, 소렌토와 폼페이의 시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네치아의 물길과 광장까지.


이제 그 여행의 한 장을 조용히 접고 또 다른 길을 향해 떠날 차례였다. 우리는 라운지를 나와 탑승 게이트로 걸어갔다. 잠시 후 비행기에 오르면 오래 마음에 품어 두었던 나라 스위스로 향하게 된다. 베네치아의 아침 햇살은 그렇게 우리를 다음 여행지로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 공항에서 스위스 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약 한 시간 남짓 하늘을 가르며 북쪽으로 날아갔다. 창밖으로는 알프스 산맥의 흰 능선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설산의 능선은 마치 하얀 파도가 굽이치듯 펼쳐져 있었다. 그 산맥을 넘어가면 곧 스위스 취리히였다.


비행시간이 짧은 탓에 기내식은 없었지만 승무원들은 승객들에게 작은 초콜릿을 하나씩 건넸다. 입안에 퍼지는 달콤한 맛을 느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스위스는 초콜릿이 풍성한 나라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잠시 후 비행기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조용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눈 덮인 산맥이 길게 이어졌고, 그 아래로 스위스의 가을 풍경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나라, 스위스의 첫 도시인 취리히로 들어가고 있었다.


취리히 공항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복잡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게 오가는 터미널을 지나 우리는 수하물 찾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기다린 끝에 컨베이어 벨트 위로 우리의 캐리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짐을 카트에 실은 뒤 우리는 서둘러 자동차 렌트 회사를 찾아 나섰다.


아이들이 미리 예약해 둔 렌트 회사는 헤르츠였다. 넓은 공항 안에서 이곳저곳을 물어가며 겨우 렌트 카운터를 찾았고, 그곳에서부터 스위스 여행의 또 다른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이들이 렌트를 위한 수속을 마친 뒤 우리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안내받은 구역에 세워져 있는 차 앞으로 가 보니 우리에게 배정된 차량은 중대형 볼보였다. 평소 우리나라에서 중소형 SUV인 투싼을 몰던 아이들에게는 차체가 훨씬 큰 볼보가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듯했다.


차가 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스위스의 낯선 길을 운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에 무게를 더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침착하게 차량 상태를 확인하고 스마트폰과 차량을 연동해 내비게이션을 한국어로 바꾸었다. 이제는 내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신호만 잘 지키며 운전하면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이미 오랫동안 운전을 해 온 아이들이었기에 하루쯤 지나 손에 익기만 하면 스위스의 길도 무리 없이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볼보 차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와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그린델발트 숙소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도로의 안내판과 내비게이션 속 아가씨의 안내를 들으며 차는 비교적 순조롭게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앞쪽으로 완만한 언덕이 나타났고, 오른쪽에는 작은 휴게소처럼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규모가 아주 큰 곳은 아니었지만 화장실도 갖춰져 있었고 관광 기념품과 빵, 초콜릿, 샌드위치 같은 간단한 음식들도 함께 판매하고 있었다.


이곳의 화장실은 유료였다. 상점 아주머니에게 부탁해 10프랑을 1프랑짜리 동전으로 바꾸었다. 2층에 있는 화장실 이용료는 1프랑이었다. 1프랑이 우리 돈으로 약 1,700원 정도였으니 한 번 이용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셈이었다.


이렇게 계산해 보니 하루 종일 이동하다 보면 화장실 비용도 꽤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음식점이나 카페 안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처음 겪는 일이니 호기심 삼아 한 번쯤 이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화장실 문화가 새삼 떠올랐다. 대부분의 공공장소에서 무료로 깨끗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꽤 큰 장점이다. 어쩌면 화장실 문화만큼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0월 중순에 접어든 스위스의 가을 풍경은 그야말로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단풍이 가장 아름답게 물드는 시기였다.


날씨마저 쾌청해 하늘은 유난히 깊고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그 파란 하늘 아래로 붉은빛과 노란빛, 그리고 짙은 초록이 어우러진 산들이 이어져 있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는 듯했다.


차를 타고 달리는 내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마다 단풍이 가득했고, 그 빛깔들은 보는 곳마다 새로웠다. 그날 우리는 해가 서쪽 산 너머로 기울 때까지 길 위에서 스위스의 가을을 바라보았다. 어디를 가든 눈앞에 펼쳐지는 단풍의 풍경은 여행 내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있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가고 해는 서산으로 막 넘어가고 있었다. 빛보다 어둠이 더 짙게 찾아오는 시간에 우리는 루체른 방향으로 고속도로를 탔고, 이어서 스위스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알려진 인터라켄을 지나 브리엔츠 호수와 툰 호수 주변을 달렸다. 산 쪽으로 더 가까이 들어가자 계곡 사이로 눈 덮인 높은 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웅장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우리가 정말 알프스 한가운데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끝에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그린델발트 마을이 눈앞에 나타났다. 알프스의 거대한 산, 특히 융프라우 아래 자리 잡은 마을과 나무로 지은 샬레들이 조용히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스위스의 깊은 산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이곳 그린델발트는 해발 1,000미터가 조금 넘는 높이에 자리 잡은 알프스 산골 마을이다.

그러나 해가 산 뒤로 넘어가자 마을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산에 둘러싸인 곳이라 그런지 저녁이 되자 금세 칠흑같이 어두워졌고, 우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숙소를 찾아가야 했다. 낯선 산골 마을의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차를 몰며 예약해 둔 숙소를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이곳 그린델발트는 해가 일찍 산 너머로 넘어가기 때문에 오후 6시쯤만 되어도 주변이 꽤 어두워진다고 한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되도록 그 시간 이전에 마을에 도착하도록 일정을 잡는 것이 좋다고 한다. 알프스의 높은 산들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풍경이지만 동시에 이곳 산골 마을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했다.

숙소인 샬레에 도착하자 집주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각은 오후 7시 가까이 되었다. 온 주변은 이미 컴컴하게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주인은 우리가 도착할 시간을 알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현관의 노란 등불이 주인의 얼굴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대략 쉰 살쯤 되어 보이는 날씬한 스위스 아주머니였는데, 우리를 보자 환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는 우리를 2층에 마련된 숙소로 안내하며 방 안의 시설과 사용 방법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샬레에는 1층과 3층에도 숙소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다른 손님들이 머물고 있다고 했다. 주인의 말에 따르면 3층에는 우리와 같은 한국 관광객이 묵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는 그분들과 일주일 동안 머무는 내내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주인은 집이 인터라켄에 있다며 인사를 하고 돌아갔고 우리는 각자 방을 정해 짐을 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저녁을 준비해야 했다. 바깥은 이미 컴컴했지만 차를 몰고 약 5분 거리의 그린델발트 중심가로 나갔다. 그곳에는 스위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Coop 마트가 있었고 우리는 간단한 저녁 재료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고기와 햄, 빵, 음료수, 그리고 와인 한 병까지 카트에 넣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자 요리 담당인 아들이 앞장서서 저녁 준비를 했다. 실제로 함께 오지는 못했지만 사진으로나마 동행한 아내의 사진도 식탁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만약 이곳까지 함께 와서 이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기쁜 마음 한편에서 조용히 눈물이 맺혔다. 우리는 스위스에서의 첫 식사를 와인과 함께 천천히 즐겼고 그렇게 알프스 산골 마을에서의 첫날밤을 마무리했다.

잠결에 우리나라 한옥 처마 끝에 달린 풍경 소리처럼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어 보니 자욱한 하얀 안개가 마을을 휘감고 있었다. 그 아래 초원에는 소 한 마리가 목에 종을 달고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맑은 종소리가 고요한 새벽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알프스가 들려주는 첫인사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창가에 잠시 서서 그 맑은 종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새벽을 맞이했다. 안개 너머로 곧 모습을 드러낼 그린델발트의 아침 풍경을 마음속으로 그려 보며 우리는 다시 천천히 잠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