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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 Aug 22. 2020

세계멸망적 날씨와 회색 손톱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올해, 회사를 제외하고 꾸준히 방문하는 장소들  하나는 네일아트샵이다. 처음 샵을 고를 때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한 기준은 위치였다. 그런 이유로 선택한, 집에서 3 거리에 있는 샵의 이름은 'OO킴뷰티'.  속눈썹을 관리하거나 손톱을 다듬는 곳은 약간 촌스러운 간판을 달고 있을  신뢰가 높아지는 건지 모를 일이다.


외모에 관해서는 천천히 '무'로 나아가는 삶을 살고 싶은데, 예를 들면 화장을 점점 줄여 최종적으로는 노메이크업으로 다니거나, 노브라로 외출하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만 미팅이 잦은 직무에 종사하는 회사원으로서 그 중 어떤 것도 평일에는 실천이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왕 꾸미는 김에 확실히 하자고 생각했다. 그 결심의 수혜는 '그대로 둬도 나쁘지 않지만 공을 들일 경우 훨씬 눈에 띄는 부위'인 손톱들이 받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없는 손톱을 견디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내가 직접 바른 매니큐어는 이틀을 지나지 못하고 벗겨지곤 했다.


젤네일에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다. 새 네일을 칠하고 굳히는 것보다 기존 네일을 말끔히 떼고 지우는 데 막상 더 긴 시간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반전일 것이다. 인간관계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한편, 어떤 선택이든 긴 시간을 들일수록 괴로워지는 나는 색과 모양에 관해서 실장님의 추천을 받는 편이고, 미리 찾아서 간다 해도 검색에 10분 이상을 들이지 않는다. 이처럼 대충 선택하는 습관과 귀가 얇은 성향 탓에 지난번에는 뜬금없이 밝은 핑크색 그라데이션 손톱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무려 사진을 미리 찾아가는 노력을 보였다.


SNS에서 우연히 보고 저장해두었던 사진은 연한 옥색의 네일이었다. 그 컬러라면 연이어 우울한 날씨와 일의 고달픔 때문에 우울한 내 마음을 정화시켜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장님한테 사진을 보여드렸는데 완전히 비슷한 색깔은 없다고 했다. 유명하거나 큰 샵이 아니라서 선택지가 제한되어 있다는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았다. 대신 최대한 비슷한 색깔을 제안받았다. 펄이 들어간 어떤 색이었는데, 옥색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하고 청색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색이었다. (색깔의 스펙트럼을 담기에 언어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느껴지시나요?) 귀도 얇고 더 고민하기도 귀찮은 나는 "이걸로 할게요!"라 답했다.


일요일 오후의 네일샵에는 손님이 나 뿐이었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실장님이 에어컨을 켜드릴까요, 물었지만, 현 상태를 바꾸는 선택을 하는 것이 귀찮았고 창문 밖의 빗소리를 듣는 일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대신 창문을 열어놓아서 더욱 실감이 드는 세계멸망적 날씨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손을 조신히 뻗은 나) "비가 그칠 줄을 모르네요"

(손가락 끝마다 호일을 감는 실장님) "올해는 망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요, 언제 그칠런지 몰라, 같은 대답을 예상했으나 올해가 망했다는 대답이 돌아온 것이 재밌어서 귀를 크게 열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6월 여기서 이십만 원을 한꺼번에 결제하는 사치를 행한 이유 중 첫번째는 실장님의 성격이 마음에 들어서인지도 몰랐다. 두번째 이유는 위치이고 세번째가 네일 실력일 것이다. 실장님의 목소리는 종종 되물어야 할만큼 조곤고곤했고(미용 관련 종사자 분들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과 다름), 내 이야기에 호들갑이나 오버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법도 없었다(중년 여성 분들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과 다름). 나의 고정관념은 무척 낡은 것들임에 틀림없지만, 어쨌든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으러 간 곳에서 대화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았다.


"코로나에 비에... 올해는 그냥 날아가 버렸어.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정말요? 처음이에요?"


대화상대가 엄마였다면 "엄마도 처음이야? 나보다 두 배를 살았는데?"라고 물었겠지만 실장님의 나이를 간접적으로라도 언급하는 것은 실례일 수 있기 때문에 선택한 질문이었다.


"그럼요. 보통은 태풍이 와도 잠깐만 고생하면 되잖아. 이렇게 비가 안 멈추고 내리는 것도 한참 만인데..."


실장님의 대답은 비극적이기도, 위안이 되기도 했다.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역시나 비극이 맞다는 점을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재확인받았다는 점에서 비극적이었다. 하지만 올해가 나보다 최소 10년은 더 살았을 분의 입장에서도 전례가 없는 한 해라는 사실은, 내 인생에서도 올해만 잘 견디면 앞으로는 이런 비극은 없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했다. 추산된 사망자만 약 73만 명이고, 사람과 사람 간의 보편적인 스킨십조차 두려워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보다 최악인 것은 IMF 급의 경제위기나 전쟁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는 요즘이었다. IMF 때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개인적인 것이 아닌 공동체적인 재앙을 온몸으로 겪는 것도 내 또래들에게는 처음이고 어느 누구도 이 사태에 대한 '얼떨떨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말하자면, 인생에 한 번 있을만큼 지구가 심각한 상황이고 날씨는 한달 반째 우울한 와중에 어제의 나는 젤네일을 받으며 실장님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던 셈이다. 원래라면 그런 모습이 웃기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나 말고도 사소한 일상을 지켜나가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건 조금도 우스꽝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즐거운 일이 하나도 없는데요. 네일이 유일한 힐링이에요."

"그쵸? 봐봐. 여자들은 얼마나 소박해."


매번 똑같이 건네는 멘트인데 실장님은 처음 들은 것처럼 대답해주었다. 사실 저번에 말했을 때는 약간의 인사치레였지만 이번에는 팩트였으니 완전히 같은 멘트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런 대화를 나누며 실장님이 시키는 대로 손을 폈다가 기계 안에 넣었다가 하는 동안 한 시간 반이 흘렀다. 그런데, '짜잔' 하고 마주한 나의 손톱 열 개에는 옥색은 온데간데 없고 (역시나 언어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애매한 색이 입혀져 있었다. 조명 탓 또는 기분 탓일 거라 생각해보았지만 그날 만난 친구가 나의 손톱을 보고 "옷이랑 깔맞춤한거야?"라고 질문하는 순간 아무것도 탓할 수 없게 되었다. (그날 입은 티셔츠는 칙칙한 회색이었다.) 선입금한 이십만원에서 이미 5만원이 차감된 후였다.


지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내 인생도 평온한 나날들이었다면 옥색의 꿈을 접고 회색이 되어버린 손톱에 속이 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전지구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내 회색 손톱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비극적인 색이라는 점에서 무척 상징적이었다. 지구의 상황을 반영하는 손톱이라니 멋있다, 라고 생각하며, 펄이 가미되어 조금이나마 덜 우울해보일 수 있는 것에 내심 안도하며 저녁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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