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라는 매개가 얼마나 다양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컨템포러리/현대미술 이라고 하면 좀 거창해보여서 동경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다만 여러가지 현대미술과 영화 등을 보다보니 현대미술이 별 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떤 생각을 중요하게 하고 있나?” 그것 하나더라구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2023 올해의 작가상>, 2021년 전주영화제 화제작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느낀 바는 요즘 현대 사람들은 ‘언어’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내가 아닌 사람들이 나와 달라져서, 소통되지 못하고 나vs타자가 과격해지는 광경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강승 작가는 퀴어 커뮤니티에 대한 깊은 공감을 바탕으로 그들이 겪는 사건, 그들이 하는 생각을 여러 매개로 표현했습니다.
왼쪽은 삼베입니다. 중간은 삼베를 입고 만남과 고통을 연기하는 연인입니다. 오른쪽은 커뮤니티의 언어 (기본적으로 영어)를 손가락으로 표현한 그들만의 문자입니다.
삼베는 수의를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이고 수의는 죽음입니다. 소수자이기에 제도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떠나보낸 이들의 언어를 기록하기 위해 삼베에 기록합니다.
퀴어 커뮤니티가 겪는 사건은 불평등과 고통에 연결되어 있지만, 그들이 하는 생각은 다정함을 초점에 둡니다. 그들은 서로를 돌보며 가족을 형성합니다. 소수의 정체성이라는 이유로 가족에 의해 배신당하고 그들이 가족을 만듭니다.
저는 그들이 말하는 돌봄의 정의와 공동체가 앞으로 가족의 정의로 바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정상가족은 산업혁명이후 시스템의 효율화를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상가족의 애착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너무나 다양한 개인이 있어서 실제로 정상가족이라고 보장받을 수 있는 범위도 한국의 경우엔 많이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가족이라는 효율적인 공동체가 사회의 최소집단이 되는 게 아니라 개인이 경제가치를 만들고 있고 최소한의 개인들이 모여 서로 돌봄을 주고 받는다면 가족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강승 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설은 이 글이 매우 잘 설명하였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플롯은 1)운전하는 차 그리고 2)연극 두 가지를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운전하는 차에는 주로 두 인물 운전자와 차의 주인이 타는데 초반에는 차의 주인이 겪는 사건을 위주로 진행되는 듯 하다가 운전자의 이야기로 점점 넘어가는 이야기 구조입니다.
이렇게 운전자와 차의 주인은 항상 앞/뒤에 타며 대화를 보통 하지 않고 운전만 합니다. 그러나 차의 주인이 아내를 잃는 사건에 대해 들으면서 운전자도 본인의 얘기를 꺼내게 됩니다.
그리고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기도 하고 운전자가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면서, 혼란스러웠던 차 주인 자신의 상처를 위로받게 됩니다.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은 죽은 사람을 두고 살아남은 자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게 됩니다.
전체 플롯은 결국 Drive my car = 내 차를 운전하다 = 내 감정을 부유해본다 가 되면서 운전의 여정이 감정의 전이 과정이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극에서 ‘유나’는 후천적 성대결절로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극 중반부에 등장하는 유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가 가장 단단하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을 잘한다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저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란 듣는 사람의 행동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말한들 내가 전달한 가치가 전해지지 않으면 생각으로 잠깐 남았다 사라질 겁니다.
유나와의 대화 이후에 주요 인물들의 온도는 달라집니다. 운전자와 차 주인 간의 심리적 경계도 살짝 허물어지게 되죠.
정말 말을 잘 하는 사람이란 주위 사람을 그가 가진 에너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유나와 반대되는 인물은 다카츠키입니다. 다카츠키는 연극 배우 신인인데 연기를 못합니다. 그가 그의 얘기를 하기 전에 그는 관객으로부터 신뢰를 얻지도 못합니다. 그는 행동에 절제력이 없고, 불안해보이며, 후회할 선택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주인공의 아내 얘기를 내뱉으면서 자신과 아내를 비교하고, 자신이 왜 불안한지에 대해 알게된 그 날 이후 다카츠키는 연기를 잘 하게 됩니다. 그가 불안했던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았던 주인공의 아내와 달리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른 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도 ‘나’가 모호한데 다른 이를 깊게 이해해서 잘 연기할 수 있을리 없습니다. 이런 불안감을 가진 목소리는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거나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유나와 다카츠키를 비교해보면, 결국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나를 잘 알기 때문에 나를 둘러싼 세계를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잘 아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언어는 이해를 표현하는 매개일 뿐 형태는 다양하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순간에 많이 나오는 장면은 ‘포옹’입니다. 누군가를 보듬을 수 있다는 것은 나를 잘 알고, 그렇기에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으며, 타자를 이해하는 데까지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모두 사람으로 이어지는 것이 결과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게 공동체의 최다이익을 불러오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은 죄수의 딜레마에서 치킨게임으로 변질되며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는 결말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결국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감상적인 말이 아니라 논리적인 말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