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쌓아 올리는 취향의 기록

전시, <울트라백화점 서울 Vol.2>

by 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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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의 새로운 장르를 선언하는 캠페인형 전시, <울트라백화점 서울 Vol.2>이 서울 DDP에서 ‘포스트 서브컬쳐’를 주제로 문을 열었다.


‘Who made this?(누가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번 전시는, 단순한 제품 전시를 넘어 브랜드와 크리에이터들이 저마다 쌓아온 취향을 공유한다. 전시는 총 다섯 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여러 취향이 촘촘히 진열된 ‘취향 백화점’처럼 펼쳐진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나란히 놓인 이 공간을 누비다 보면, 관람객은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는 동시에 이미 가지고 있던 자신의 취향을 천천히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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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시작점인 ‘서브컬쳐 스트릿’은 여러 인사이트 플랫폼이 제안하는 큐레이션을 모아놓은 공간이다. 예전부터 구독하고 있던 엘르보이스 뉴스레터 속 글들을 이곳에서 마주하니 반가움에 해당 세션의 엽서를 만지작거리게 된다.


튕겨 나갈 수도 있고, 끝내 외면 해도 좋으니 일단 듣는 것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외침의 시대에서 들어서기 전에도, 우리는 늘 듣는 것을 어려워했다. 듣는 건 이해의 선행이다. 이해는 공감과는 상관없는 ’받아들임’이다. 어떤 이해는 자연스럽게 흡수되지만 어떤 이해는 덩어리진 채 몸 곳곳에 낀다. 가끔 불편하고, 때로는 외면하고 싶다. 하지만 이해라는 것이 원래 어렵고 힘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듣는 게 한결 쉬워지지 않을까? 듣는다고 해서 상대방의 말을 온전히 흡수할 필요가 없으니까. 튕겨 나갈 수도 있고, 끝내 외면해도 좋으니 일단은 듣는 것이다.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무엇이 문제여서 저토록 외치고 있는 것인지.

새해에는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 천선란 소설가
<엘르> 2024년 1월호, 엘르보이스 86번째 뉴스레터


해당 문구가 적힌 엽서를 한 손에 쥔다. 입에서 해당 글을 굴려본다. 본격적인 관람에 앞서, 앞으로 마주하게 될 수많은 취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노라 다짐을 하면서.


이 밖에도 ‘능숙하게 거짓말하는 법’, ‘회피형 인간 손쉽게 다루는 법’, ‘느좋 노숙하기 좋은 서울 스팟 5’, ‘타이틀곡보다 더 손 가는 수록곡’, ‘위로받고 싶은 날 들으면 좋은 플레이리스트’ 같은 문장들이 적힌 종이 엽서들은 피식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세상의 다양한 취향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리된 모습을 보여준다.


두 번째 공간인 ‘비사이드 레코즈’는 취향이 가장 선명하게 갈리는 영역, 음악을 다룬다. 음반에 담긴 제작자의 이야기를 LP 형식에 담았다. 이곳에서 관람객은 테마별로 비치된 LP를 꺼내어, 적혀 있는 제작기를 읽고 듣는 방식으로 공간을 즐길 수 있다. 청춘, 내면, 열정 등 테마별로 나뉜 플레이리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음악을 발견하게 된다. LP라는 물성을 만지다 보니, 음악 어플 속 재생 버튼 하나로 손쉽게 음악을 소비하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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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에비뉴’는 전시장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는 섹션으로, 해당 전시에 참여한 여러 출판사의 개성이 드러나는 부스들로 구성되었다. 각 출판사별로 주제를 잡아 이를 대표하는 책들이 소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각 부스마다 놓여 있는 서로 다른 책갈피의 모양은 단숨에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부스를 돌면서 수집한 책갈피 속 짧은 문장 속에는 출판사마다 책을 대하는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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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읽을 때 특별한 마음까지 필요하다는 건 너무 쓸데없다.
이 글을 읽는다면 고개를 한 번 돌리고, 허리를 펴고, 심호흡을 하세요. 그게 더 도움이 됩니다.

- 종이잡지클럽


책 만들고 파는 일의 즐거움, 읽는 사람은 꾸준히 성장한다는 확신, 그리고 아직 만들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우리가 계속해서 책을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아무래도, 모르는 게 많은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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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에비뉴'의 각양각색의 부스 옆쪽에는 ‘페이지 라이브러리’라는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방금까지 출판사별 부스에서 소개되었던 책들을 직접 읽을 수 있는 공간이다. 나 역시 마음에 남았던 책 한 권을 골라 자리에 앉았다.


한쪽 구석에는 다양한 질문이 담긴 종이들이 놓여 있다. 이 종이에 관람객은 자신만의 답을 적어 벽면에 걸어둘 수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춰, 타인의 생각이 담긴 답변을 찬찬히 읽어본다. 삶을 대하는 태도, 가치관 등 하나의 질문에서 뻗어나가는 서로 다른 세계를 엿보는 일을 관람의 재미를 더한다.


네 번째 공간인 ‘리뷰어스 씨어터’는 독립영화를 큐레이팅한 공간으로, 전체가 작은 영화관처럼 구성되어 있다. 낯설지만 흥미로운 영화들이 소개되고, 그중 마음에 드는 작품은 티켓처럼 발권할 수 있다. 상영 시간에 맞추면 작게 마련된 상영관에서의 관람도 가능하다. 관심 있는 영화의 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전시를 더욱 풍성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더 리얼 부티크’에서는 패션에서 비롯된 단단한 취향들이 이 공간을 채운다. 그중 나는 ‘바늘 이야기(banul iyaki)’ 부스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한 땀 한 땀, 시간을 엮어 나가는 작업에는 언제나 마음이 쏠린다. 걸음을 멈춰 바라본 베이지색 손가락장갑의 사진이 담긴 엽서 뒷면에는 이런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처음으로 건네받은 인정의 기록이다. 이는 기술적 결과물이라기보다 멈추지 않아도 된다는 하나의 신호였다.

- banul iyaki, 손가락장갑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실력을 인정받으며 뜨개에 대한 확신과 성취감을 안겨준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읽고 나니, 같은 작품이 전과는 다르게 보인다. 이처럼 각 작품마다 놓인 엽서를 뒤집어 보면, 물건 뒤에 담긴 제작자의 히스토리가 드러난다. 저마다의 취향과 서사가 더해지는 순간, 전시장 속 어느 작품 하나도 쉽게 지나칠 수 없게 된다.


모든 섹션이 끝난 뒤에는 ‘울트라 스토어’가 이어진다. 전시를 지나며 눈에 익었던 브랜드들의 제품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전시 전체를 압축해 놓은 하나의 요약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관람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소비로 이어지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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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모두 둘러본 뒤 출구로 향하는 길, 아티스트와 함께한 ‘포스트 서브컬쳐’라는 이름의 복도가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작업은 선호탄 작가가 스크랩북으로 취향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스크랩’이라는 행위였다. 개인의 취향이 점점 더 세분화되는 시대 속에서, 선호탄은 이것을 하나의 ‘스크랩북’처럼 축적되는 감각으로 바라보았다.


- 선호탄, 취향이 쌓이며 만들어지는 '프라이빗 스크랩북' 같은 풍경


시간이 지나면 '취향이 변한다'라고들 한다. 어쩌면 취향은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계속해서 덧입혀지고 쌓이는 과정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이번 <울트라백화점 서울 Vol.2> 전시는 지금껏 내가 쌓아온 취향 위에 새로운 감각을 한 겹 더 얹는 경험을 가능케 한다. 그렇게 켜켜이 쌓아 올린 감각들은 내 취향의 스크랩북을 조금 더 두툼하게 만들어 준다. 빠르게 소비되는 취향에 익숙해져 있었다면, 이곳에서만큼은 조금 천천히 머물러보며 자신만의 스크랩북을 쌓아보는 것도 좋겠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