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극장의 시간들>
영화 〈극장의 시간들〉은 이종필, 윤가은, 장건재 감독의 세 편의 단편을 엮은 옴니버스 영화다. 세 영화는 모두 '극장'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각기 다른 인물들과 시간대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극장은 당신에게 어떤 시간을 남겼는가.
세 편의 단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영화는 상영관 뒤 영사실에서 필름을 감는 모습을 보여주며 문을 연다. 영사실의 노신사는 새로 온 소녀에게 필름을 다루는 법과 영사실의 규범을 알려준다. 마치 지금 그들이 감고 있는 필름이 곧 우리가 보게 될 이야기인 듯, 영사실 속 필름이 돌아가면서 <극장의 시간> 속 첫 번째 단편 <침팬지>가 자연스레 이어진다.
이종필 감독의 첫 번째 단편 〈침팬지〉는 극장에서 우정을 쌓은 고도와 모모, 제제 세 친구의 우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예술영화를 관람하면서 만나게 된 셋은 극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여느 때와 같이 관람 후기를 나누던 어느 날, 젊은 고도(원슈타인 역)는 어느 날 동물 이야기를 담은 책에서 침팬지의 특징에 강하게 이끌린다. 함께 동물원을 찾은 그들은, 동물원 지하에서 그 내용을 확인하고, 그 경험은 셋 사이의 유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중년이 된 고도(김대명 역)가 헌책방에서 다시 펼쳐본 책의 내용은 그의 기억과 어긋나 있다. 그의 기억이 왜곡된 걸까, 아니면 애초에 사실이 아니었던 걸까. 영화는 끝내 정확한 답을 밝히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묻는다.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보다, 그 기억을 함께 나눈 시간이 더 중요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고도가 동물원 게시판에 침팬지의 안부를 묻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 시절 나와 함께 영화를 보던 그리운 친구들, 다시 극장을 찾은 고도의 뒷자리에는 그의 안부에 응답이라도 하는 양 침팬지가 관객석에 앉아 고도와 함께 영화를 관람한다.
두 번째 단편 〈자연스럽게〉는 한 아이의 얼굴을 정면으로 클로즈업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관객들은 단번에 스크린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산길을 걷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사이로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화면 안으로 한 여성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이내 이곳이 ‘영화 촬영 현장’ 임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영화를 찍는 영화’다. 극 중 감독(고아성 역)은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운 연기’를 주문한다. 그러나 그 말은 곧 질문이 된다. 자연스럽다는 건 뭘까? 연출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영화는 이 질문을 붙든 채 아이들의 연기를 비춘다. 스크린 속 아이들을 보며 '얼마나 자연스러운가'를 가늠하던 순간, 놀이터에서 어린 배우와 제작진이 뒤섞여 함께 뛰노는 장면이 등장한다. 카메라 앞과 뒤, 연기와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연출된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자연스러움’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들>, <세계의 주인> 등 아이들의 시선을 섬세하게 담아 온 윤가은 감독과, 아역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 고아성 배우가 극 중 감독 역할을 맡은 점은 이 단편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세 번째 단편 〈영화의 시간〉은 감독과 배우뿐 아니라 이 영화를 만든 수많은 스태프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한다. 수십 명의 이름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동안, 관객은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쌓였을 보이지 않는 시간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스크린 밖의 시간까지도 ‘영화의 시간’으로 끌어들이는 셈이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극장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시선이 향한다. <영화의 시간>은 영화관 청소 노동자, 매표소 직원, 영화를 보러 온 관객 등 우리가 쉽게 지나쳤던 그들의 시간을 전면에 배치한다. 보이지 않던 시간이 얼굴을 얻는 순간이다.
이야기는 영화(양말복 역)가 우연히 극장에서 여고동창 우연(장혜진 역)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극장에서 청소 노동자로 일하는 우연의 권유로 영화는 아주 오랜만에 스크린 앞에 앉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자리, 한동안 멀어져 있던 극장의 시간이 그녀의 삶에 스며든다.
하지만 긴장이 풀려서일까. 상영 도중 잠이 든 영화는 꿈속에서 장대비를 만난다. 저마다 비를 피해 극장 아래로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현실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기 위해 우리가 극장을 찾는 모습이 겹쳐진다. 정해진 시간 동안에는 꼼짝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는 곳.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로 옮겨가기도 하듯이.
영화가 끝난 뒤 잠들어 있는 영화를 우연이 조용히 깨우고, 극장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영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부터 상영이 끝난 후 관객의 발걸음까지, 스크린 위 러닝타임을 넘어 영화를 둘러싼 모든 순간을 '영화의 시간'으로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단편이다.
세 편의 단편이 끝난 뒤, 스크린은 다시 영사실을 비춘다. 오프닝 속 소녀는 이제 능숙하게 영사기를 돌리고 노신사는 객석에서 영화를 관람한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역할은 바뀌었지만 극장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맞물리며 영화는 '극장'이라는 공간에 축적된 시간을 다시금 환기한다.
특히나 영화의 배경이 바로 내가 영화를 관람하고 있던 극장, 씨네큐브 광화문이라는 점은 이곳에서 <극장의 시간들>을 보는 관객들에게 더욱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스크린 속 공간과 내가 앉아 있는 현실의 공간이 겹쳐지는 순간, 나는 단순한 관객을 넘어 그 시간의 일부가 된다.
극장의 시간은 그렇게,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흐르고 있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