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REview

사람을 넘어, 삶을 기획하는 일

도서, <사람을 기획하는 일> (편은지, 2026)

by 모래

대학에 들어와 처음 마주한 현지조사는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낯선 환경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었다. 신입생이던 나보다 네 살 많던 선배와 같은 조가 되어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고역이었다. 마을에 도착하자 내게 주어진 일은 오늘 하루 동안 오간 모든 대화를 작은 수첩에 하나도 빠짐없이 적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실시간으로 녹음을 텍스트로 변환해 주는 어플들이 많지만, 그때는 수기로 받아 적거나 녹취를 몇 번이고 돌려 들으며 대화를 풀어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전부 다요?”라는 나의 물음에 선배는 라떼를 시전 하며 '원래 신입생들은 다 그래야 되는 거'라며 당연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선배와 주민들의 대화가 시작되면, 나는 옆에서 토씨 하나라도 놓칠까 봐 숨을 죽이고 적었다. 진짜... 다 적었다. 괴발새발로 글씨를 흘려 쓰면서도 마을회관의 할머니, 할아버지, 이장님의 농담 하나까지 적어 내려갔다. 노트를 넘기다 행여 대화 흐름을 놓칠세라 후다닥 페이지를 넘기면서 말이다.



볼펜똥이 손바닥에 덕지덕지 묻고 오른쪽 어깨가 뻐근해질 무렵, 해가 졌다. 뿔뿔이 흩어져 마을을 돌아다니던 조원들은 숙소였던 마을회관으로 모였다. 저녁을 먹고 반질반질한 적갈색 밥상 앞에 둘러앉아 조장 언니를 필두로 각 분조장 선배들이 오늘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를 나누는 간략한 스터디가 이어졌다. 스터디의 마지막은 신입생들이 그날 적은 필드 노트를 발표할 차례였다.


우리 조에 신입생 동기는 나를 포함해 모두 네 명. ‘제발 내가 첫 번째는 아니어라’ 속으로 빌었지만, 우리 분조 선배는 냅다 본인 조부터 발표하겠다고 해버렸다. 원망스러운 눈으로 선배를 쳐다봤지만 선배는 끝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나는 노트를 뒤적거리며 오늘 있었던 대화들을 더듬더듬 이어 나갔다.


발표가 끝나자 건너편에 앉아 있던 조장 언니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떤 게 더 알고 싶어 졌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는 그냥 적으라고 해서 줄줄 적었고, 그걸 그대로 읽어 내려갔을 뿐인데! 우물쭈물하다 아무 말이나 내뱉었지만,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당시 얼굴이 화끈거리던 감각만은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남은 지금까지도 무척이나 선명하다.


창피했다. 그날의 창피함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똑 부러지게 대답하지 못한 데서 오는 창피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루 종일 인터뷰를 받아 적는 데에만 몰두했던, 지나치게 수동적인 나 자신에 대한 창피함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첫 번째 창피함은 자연스레 옅어졌지만, 두 번째 창피함은 후폭풍이 거셌다. 신입생 시절을 지나, 어느덧 졸업 보고서를 쓰기 위해 그동안 다녀온 현지조사 보고서들을 다시 들여다봤다. 어딘가 알맹이가 쏙 빠진 기분. 그럴듯한 개괄과 잔뜩 꾸며낸 문장들은 많았지만, 정작 보고서 속 문제의식으로 삼은 질문이 과연 내가 그 당시 진짜로 궁금했던 질문이었는가에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오히려 현지조사에 가기 전 미리 정해둔 질문 하나에 맞춰 인터뷰를 끼워 맞춘 글 같았다.



그때의 기억이 책 『사람을 기획하는 일』을 읽으며 다시 떠올랐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배웠던 용어, ‘라포 형성(Rapport building, 의사소통에서 상대방과 형성되는 친밀감 또는 신뢰 관계)’을 우리는 현지조사 현장에서 몸으로 배우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편은지 PD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기획하는 일을 ‘사람을 사랑하는 일’ 혹은 ‘사람을 이해하는 일’로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결국은 사람을 온전히 조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기획하는 일』, p.20~23


"그래서 네 생각은 뭐야?"

이제는 누구나 그럴싸한 문장을 단 몇 초 만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진부하기 그지없는 이 질문, "대체 네 생각은 뭐야?"라는 말의 무게감이 오히려 더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그럴듯하게 포장된 말들은 넘쳐나지만, 그 속에 정작 '내 지분', 즉 '나만의 생각'은 없습니다.

『사람을 기획하는 일』, p.75


매 현지조사마다 조원들이 모여 마을어르신들께 먼저 인사를 드리던 모습. 일손이 필요하지 않냐고 여쭤보며 대뜸 옆에 앉아 어머님과 고구마를 캐던 날. 전교생이 단 세 명뿐인 분교에 다니는 남매와 하루 종일 놀다가 갑자기 쏟아진 비에 바닥에 말려둔 감태를 줍느라 온몸이 젖었던 하루도 있었다. 늦은 밤 선착장 근처에서 오징어를 안주 삼아 이야기를 나누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이장님의 푸념을 들어드리던 일, 그러다 몰래 꾸벅꾸벅 졸던 모습까지.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 관찰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관계를 맺는 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에는 보고서에 쓸만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고,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던 그 순간들이 책에서 말한 기획의 첫걸음과도 같았다. 책장을 넘기면서, 어쩌면 내가 그 당시 써야 했던 현지조사 보고서의 기획 또한 관찰을 통해 쌓은 라포에서 시작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마저 남는다.


나는 이제야 손이 아프기만 했던 그 귀찮은 일을 선배가 시킨 이유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스무 살이었던 그 시절의 나는 남의 말을 받아 적기만 했을 뿐, 그것을 나의 언어로 소화하지 못했다. 타인의 이야기를 꼭꼭 씹어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가장 강력한 소화제는 다름 아닌 타인에 대한 ‘관심’이었다.


시간은 어느새 시대의 강력한 재화가 되었고, 가성비와 효율을 따지는 시대에서 천천히 시간을 들여 누군가를 관찰하는 일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때로는 지루하고 무용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올 즈음,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그 사람의 행동들. 관찰은 관심이 되고, 관심은 결국 타인을 이해하게 만든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여러분 안의 열등감과 생활 속 곤궁함들, 이것들을 제거하려고 너무 애쓰지 마세요. 오히려 그럴수록 뚫어지게 바라보세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것들을 그 자체로 인정하게 되고, 나도 모르는 새 애정이 생기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번지르르 잘난 것들보다, 오히려 못나서 더 진짜이며, 못나서 더 쓸모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기획하는 일』, p.208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이라는 단어가 숨어 있듯,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삶이 존재한다. 책을 읽는 ‘나’라는 사람의 삶에도 관심을 갖고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일, 그 끝에는 자신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남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편은지 PD의 『사람을 기획하는 일』은 사람을 넘어, ‘삶을 기획하는 일’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