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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 Aug 01. 2024

우리는 서로의 위로가 되어

공연,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

중학교 1학년 반 학급 일기 관리자를 맡은 적이 있다. 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출석번호순으로 반 친구들이 까먹지 않고 학급 일기를 쓸 수 있도록 일기장을 전달 및 보관할 것, 학기 말에는 문집에 실릴 친구들의 일기를 선별하는 일이었다. 가끔씩 성의 없이 일기를 쓴 친구를 찾아가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화난 표정과 함께 다시 쓰라는 말을 건네는 정도랄까.


매일매일 챙겨야 하는 일이 귀찮을 법도 했지만, 사실 재밌었다. 나는 관리자라는 명목으로 그날 반 친구가 쓴 일기의 첫 번째 독자가 되었는데, 모두가 돌려보는 일기장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꽤나 솔직한 일기를 썼다. 오늘 수업이 너무 지루하다부터, 본인이 빠져 있는 관심사, 어제 먹은 저녁 메뉴까지. 각자의 개성만큼이나 일기의 주제도 천차만별이었다.


본인을 닮은 글씨체로 짧게는 3~4줄, 길게는 노트 한 바닥을 가득 채운 이야기 속에서 아직까지도 생각나는 내용은, 우리 반 체육특기생 친구의 일기였다.


수업시간에 잠만 자던 애, 내가 몇 번이나 자리로 찾아가 다시 쓰라는 닦달을 하게 만들던 애. '넌 숙제 안 하냐'는 질문에 그냥 맞으면 된다고 다시 엎드려 자던 친구였다. 어린 마음에 '쟤는 참 고민 없이 산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날도 별생각 없이 그 친구가 쓴 일기장을 받아와 자리에 앉았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글씨와 일기의 분량은 평소와 같았지만, 지금 겪고 있는 고민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부끄럽지만,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저마다의 고민이 존재한다는 걸. 



뮤지컬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은 학창 시절 학급 일기를 닮았다. 저마다의 생각과 고민을 안고 있는 주민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반려견 진돌이와 살고 있는 마을의 큰 어른 장영감부터 그런 장영감의 아들 대주, 남편과 딸을 육아하는 미라, 드라마 보조작가 여름, 버스킹을 하며 가수를 꿈꾸는 하준, 대학생 연우까지.


그들은 자신의 고민을 빨래방 한 구석에 놓인 다이어리에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 다이어리 속 타인의 고민에 자신이 전할 수 있는 위로의 문장을 함께 적어두기도 한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생활고에 괴로워하는 미라에게 장영감이 달아준 메시지였다. 장영감은 미라에게 토마토 화분을 선물하며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남긴다.



(...) 화분 기르기를 권합니다. 직접 흙도 만지고 햇볕도 쬐어주고 물도 주고 가끔 통풍도 시켜주며 스스로도 바람을 쐬어보세요. 내가 화분을 기르는지, 이 조그마한 식물이 나를 가꾸는지 모를 만큼 기분이 훨씬 나아질 겁니다.



비단 화분뿐일까. 삶도 그렇다. 나에겐 오로지 나만이 내 삶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무엇이든 내가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남의 도움을 받는 건 민폐라 생각해서 어려운 일이 생겨도 혼자 끙끙 앓았다. 그렇게 곪아 터진 문제가 마음속에서 겨우 잠잠해질 때쯤 '사실 그때 이랬어.'라고 머쓱하게 웃고 넘겼다. 


내 삶에 대한 묘한 책임감은 나를 조금씩 외롭게 만들었다. '너는 좀 어려워', '같이 있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듣고 나서도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조차 모르겠던 날들이었다.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무거운 짐을 떠넘기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그 생각은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완전히 바뀌었다. 먼 거리임에도 장례식장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주던 사람들. 이럴수록 뭐라도 먹어야 된다며 음식을 우리 가족들 쪽으로 돌려주던 이. 누구는 우리 곁에서 함께 울었고, 누구는 우리 엄마의 어깨를 연신 쓸어내리며 자리를 지켰다.


나 혼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마음들이었다. 시동이 꺼진 차 안에 앉아 생각했다. 이렇게 받은 마음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옆에 있던 사촌언니에게 이런 내 생각을 털어놓자, 언니가 말했다. 이럴 땐 그냥 받아도 된다고, 나중에 너도 그러면 되는 거라고.


그러고 보니 대학시절 한 교수님도 그러셨다. 모든 관계는 부채(負債)로 이어지는 거라고. 서로 주고받고, 되돌려주는 빚짐의 상태. 나는 그제야 몇 년 전 전공 수업, 장례식장에서 언니가 나에게 했던 말의 의미를 알게 됐다. 우리는 서로 필연적으로 마음을 빚질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걸 말이다.


그날 내가 보고 느꼈던 마음은 나와 우리 가족이 장례식을 무사히 치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내가 아닌 타인이 나를 삶으로 이끌어준 순간이었다. 그때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내 삶도 온전히 나 혼자만 이끌어가던 건 아니었겠구나. 나도 모르는 새 나의 짐들을 들어준 사람들이 분명 있었겠구나,라고. 


미라를 향한 장영감의 위로는 미라에게서 다시 연우에게, 여름은 하준에게, 하준은 다시 여름에게로 전달된다.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대주는 아버지가 쓴 빨래방 다이어리 속 이야기를 보고 다시 아버지에게 다가갈 용기를 낸다. 호혜와 연대 속에서 빙굴빙굴,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에서 서로가 담아 보낸 진심은 동그란 파동이 되어 멀리 퍼져 간다.


내 마음을 그때 학급 일기에 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은 잠시 접어둔다. 내가 남들에게 보낼 수 있는 진심을 차곡차곡 모아둬야지. 그리고 이런 내 마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준다면 언젠가 그 친구에게도 닿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갓 말린 빨래처럼 마음이 뽀송해진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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