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디자인 학회의 ‘디자인 연구 논문 길잡이‘를 읽고
처음 연구를 시작하려는 대학원생들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은 뭘까?
바로 첫 시작인 ‘주제 선정 하기’ 이다.
좋은 연구 주제는 너무 넓지도, 너무 좁지도 않은 중간 정도의 연구 범위를 가지면서, 독창적이고 연구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객관적 타당성도 갖고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시작은 이미 반을 끝낸 것과 같다’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좋은 연구 주제의 조건을 생각해보면, 주제를 정하지 못해서 연구 자체를 시작도 못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연구를 할 수 있을까 조언을 구하다보면 ‘흥미롭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연구 질문을 가져라’ 혹은 ‘좋은 연구 예시를 많이 읽어봐라’ 등의 답변이 돌아오는데, 여전히 적당한 주제를 찾는 데에는 도움이 안된다.
그래서 오늘은, 연구 주제를 선정하기 위한 7가지 지침 을 정리해보았다.
1. ‘연구’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기 : Do not reinvent the wheel
2.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 세우기 : Low hanging Fruit
3. 낯설게 바라보기 : Down to earth
4. 빨리 실패하기 : Fail Fast
5. 협업 활용하기 : Joint research
6. 개인적인 동기 : Intrinsic Motivation
7. 일시적이거나 개별적인 기타 요인 (연구비, 연구팀, 졸업 후 진로)
Do not reinvent the wheel
연구 주제를 잡기 전에 먼저 ‘연구’라는 개념의 정의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영어로 research는 중세 프랑스어 recherche(re와 cherche의 결합)에서 출발한 단어로, ‘무엇인가 반복하여 찾다’ ‘무엇인가 찾는 것을 시도하다’라는 뜻이다. 궁금한 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식을 습득하거나 경험을 통해 학습을 하게 되는데, 이 때 기존의 지식을 통해 해결책을 찾지 못할 경우 필요한 것이 ‘연구’다. 만약 기존 지식의 습득을 통해 궁금한 질문에 답이 충분히 되었다면, 연구를 수행할 필요가 없다.
즉, 연구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을 새롭게 밝히거나 개척하는 활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연구의 정의와 관련하여 학계에서 많이 회자되는 문장이 하나 있다.
Do not reinvent the wheel
바퀴를 다시 발명하지 말라
이미 누가 해 놓은 것을 다시 하는 데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란 뜻이다. ‘바퀴’같이 쓸모 있는 것일지라도 누군가 벌써 해 놓지 않았는지 살펴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학문적으로 다시 해석해보자면, ‘아무리 위대한 연구라도 누군가 먼저 했다면 하등 가치가 없다’ 라는 말이 될 수 있겠다. 연구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파고드는 활동이라는 걸 다시금 일깨워준다.
‘바퀴를 다시 발명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면 기존의 문헌을 열심히 분석해야 한다. 비슷한 연구 주제의 논문이 기존에 나와 있더라도 내 주제가 어떻게 차별화 될 수 있을지 비판적으로,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바퀴를 발명한 사람’은 꼭 기록으로 남겨서 자신의 위대한 연구적 성취를 다른 연구자들이 찾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중요성도 함께 알려준다.
Low hanging Fruit
Low hanging Fruit 라는 말이 있다. ‘낮게 달려 있는 과실’이라는 뜻으로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연구 문제를 의미한다. 연구를 처음 시작하는 연구자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수행하기 수월한 주제를 선택하여 경험을 쌓는 것이 필요하다.
나무 열매가 열리면 가장 아래에 달린 것이 먼저 수확되듯, 존재하지 않았던 독창적인 연구 분야라는 ‘나무’에서도 가장 아래 달린 열매, 즉 확장이 수월한 연구 주제가 가장 먼저 수행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어렵지 않은 연구는 없다. 연구 난이도나 가치에 경중을 부여하는 일은 상당히 조심스럽지만, ‘상대적으로’ 수월한 경우가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연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의 경우, 연구의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 ‘커다란 성과’ 주위에 있는 ‘작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주제를 찾는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Down to earth
‘낯설게 바라보기’는 2번과 연결되는 전략이다.
아래 전설적인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과 그의 제자 코이치 마노의 대화를 살펴보자.
제자 : 이런 이런 연구들을 현재 진행중입니다. (중략) 변변치 않은, 현실적인 연구이지요.
스승 : 가치 있는 질문이란 실제로 풀 수 있는, 그래서 진정으로 공헌할 수 있는 것들이야. (중략) 그것이 얼마나 사소하든지 간에 자네가 정말 쉽게 풀 수 있는 더 간단하고 더 변변치 않은 문제들을 선택하기를 조언하네. (중략) 우리가 진정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문제도 작거나 사소하지 않다네.
위 대화에서 알 수 있듯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크고 거창한 목표’가 아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소박한(해결 가능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독창적 관점‘이다. 연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리처드 파인먼 같은 대학자도 제자에게 강조한 부분이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인류 지식의 경계를 확장시키는 새로운 지식은 그 크기가 매우 작다.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것이다. 아무리 박사 학위 연구라 한들 인류 전체의 지식에 비하면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그 작은 공헌이 모여 인류를 위대한 종으로 만들었다.
대부분의 연구자 (특히 연구를 이제 막 시작하는 연구자) 들이 자신의 연구 가치에 크게 회의감을 갖거나 낙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정으로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연구는 모두가 간과하고 지나친 부분에 새로운 렌즈를 갖다 대어 낯선 관점으로 인류의 지식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다. 내가 하는 연구가 무가치하고 사소한 것이라는 생각 대신 인류의 지식 경계를 살짝 찔러 보는 거라고 발상을 바꿔보자. 이미 존재하는 연구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경계 바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Fail Fast
연구 환경은 날이 갈수록 척박해지고 있다. 특히, 디자인 분야에서는 박사 학위자가 늘어나는 동시에 전시와 같은 창작 활동 외에 논문 실적을 요구하는 곳이 늘어났으며, 그 수준도 계속해서 상향 평준화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연구자가 더욱 효율적으로 연구를 수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연구란, 그 자체로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하이리스크 작업이지만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실패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연구의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며, 이는 가설에 대한 검증이 실패로 판정 날 것이라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적은 리소스로 이를 알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한 방향으로 깊이 진행하기 전에 짧은, 소규모 예비 실험으로 가능성을 확인하든지 아니면 여러 방향을 동시에 살펴봐야 한다. 이렇게 해야 리소스 낭비를 최소화하고 그 과정에서 얻는 경험을 축적할 수 있게 된다.
Joint research
요즘은 단독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경우를 보기 힘들고 지도 교수를 중심으로 연구 팀을 꾸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연구 주제 선정 전략으로써의 협업’ 같은 경우는, 단순히 일을 분배하는 개념이 아닌,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모여 새로운 경계의 확장을 이루는 걸 의미한다.
물론 모든 협업이 그러하듯, 장단점이 있다. 먼저 가장 큰 장점은 하나의 아이디어가 예측 불가하게 여러 방향으로 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 주요 성과가 어느 분야에 귀속되는가에 대한 마찰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융합 연구 그룹이 새로운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는 점, 창의적인 연구 수행 방법을 고안할 수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결과를 검증할 수 있다는 점 등 공동 연구의 거시적인 장점은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이러한 측면에서 연구자들은 여러 지식의 경계가 교차하는 협업 기회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Intrinsic Motivation
기본적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는 자신의 흥미나 경험과 같은 개인적인 동기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연구 주제를 선정할 때 의외로 중요한 요소가 매우 개인적이고, 사적인 동기이다.
예를 들면, 생명 과학 연구자의 경우, 본인이나 가까운 사람의 질병 유무와 같은 개인적인 동기가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절절한 동기가 아니더라도 연구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학자로서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내적 동기에 기반한 연구 주제 선정이 필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도 속해있는 학문 분야 혹은 연관지을 수 있는 주제에 대해 미리 미리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일이 연구 주제 선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연구비, 연구팀, 졸업 후 진로
연구 주제 선정 과정에서 고려되는 요인이 이렇게까지 많고 장황한 이유는 기계적인 공식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이야기할 현실적인 요소들이 그 과정을 더욱 더 복잡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시대적 요구나 분야별 트렌드 등 거시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지도 교수의 연구 분야와 흥미, 혹은 취업 준비와 같이 일시적이고 개별적인 요인도 있다. 이 중, 크게 세 가지 정도를 살펴보려고 한다.
가장 먼저, 연구비. 이공계 계열에서는 중장기적인 재정 지원이 있는 경우가 많고 인문사회 계열일수록 그러한 기회나 액수가 적은 편이다. 디자인 분야는.. 말할 것도 없다. 재정 자립도가 클수록 주제 선택의 자유가 커진다는 건 연구 경력과 상관없이 적용되는 법칙이다. 따라서 연구비로 달성해야 하는 지향점과 자신의 연구 목표가 가까울수록 이상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연구 그룹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연구를 단독으로 진행하는 경우보다 교수를 중심으로 어떤 연구팀에 속해서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학생 입장에서는 지도 교수의 전문 연구 영역이나 연구 진행 스타일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연구 시작 전, 지도 교수의 연구 분야나 주제 선정에서 고려하는 요소, 협업 스타일, 네트워크 등을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졸업 후 진로다. 이미 많은 전문가가 배출된 분야일수록 산업에서 수요가 적을 수 있고, 많이 성숙된 학문 분야일 수록 새로운 발견이 나오거나 신진 인력의 수요가 적을 수 있다. 단지 학위 취득 후의 취업뿐만 아니라 학문 분야의 전망이 연구자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는 연구 주제 선정에 있어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을 모두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구자 개인의 내적 동기에 따라 연구 주제가 결정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자신의 의지가 무관한 불가항력 요인들도 넘쳐난다. 갈수록 실적에 대한 요구와 경쟁이 높아지는 시점에서 연구 주제에 대한 전략적인 고민은 꼭 필요하다.
본 글은 한국 디자인 학회에서 작성한 [디자인 연구 논문 길잡이] 중 [1부 : 디자인 연구의 이해]와 [4부 : 디자인 연구의 노하우] 내용을 요약 정리한 후,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