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용의 <일의 감각>
지난달 말에 우연히 보았던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조수용 대표의 인터뷰 영상을 보게 되었다. 워낙 업적이 많은 분이라 그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편견으로 시작했던 내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 대 맞은 것 같은 강렬함까지 느껴졌다. 내로라할 이력이 많은 그의 말에서, 당장 클라이언트의 난해한 수정 요청에 한숨이 먼저 나오는 상황인 내게 적용할 만한 건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건 그야말로 대단한 착각이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철학적이고 내면의 깊은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생각해 볼 지점이 많다고 느꼈다. 그 부분을 글로 정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가 이번에 낸 <일의 감각>이라는 책도 곧장 구입해 읽어보았다. 강한 인상을 받았던 만큼 나는 잘 정리된 글을 쓰고 싶었다. 몇 주간 책을 읽으며 끄적여보던 메모가 쌓이고, 책도 다 읽었지만 좀처럼 글로 풀어내는 게 쉽지가 않았다. 어쩌면 ‘잘 정리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내 발목을 잡았던 것 걸까?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은 계속해서 해야 할 숙제를 미뤄둔 기분으로 이어졌고, 그렇게 시간은 어느새 12월 중순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프리랜서에서 좀 더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오랜만에 브런치 앱에 알림이 울렸다.
‘뭐지? 스토리 크리에이터? 광고 문구인가?’ 하며 문장을 눌러보니, 광고가 아니라 나에게 하는 문장임을 알았다. 나만의 창작 분야를 가진 스토리 크리에이터에게 주는 배지라고 하는데, 내가 선정된 분야는 다름 아닌 ‘커리어’ 분야다. (제가요?) 어라 이상하다.
글도 잘 써지지 않았겠다, 순간 혼자 숨 고르기라는 핑계로 잠시 거리를 둬볼까 생각했던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때마침 브런치가 그걸 알고서는, ‘자, 이제 들켰으니, 어서 글쓰기를 이어가세요.’라고 등 떠밀어주는(?) 기분이었다.
10년 동안 1인 프리랜서로 혼자 부딪히고 넘어져가며 체득한 것은, 커리어도 넘치는 자산(?)도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건 '일의 태도'이자 '마음가짐' 같은 것이었다. 갑과 을의 위치에서 언제나 을의 위치에 있는 입장이지만, 거기서 중심을 잘 잡을 수 있는 마음가짐 같은 것들 말이다.
프리랜서 초창기, 방황하고 울고불고, 화내고 자책하고, 현타 오고, 자괴감에 빠져들고, 실패에 압도당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려고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과 생각들을 이제는 마치 제삼자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다. 그때의 부족했던 내가 보였고, 그럼에도 무엇보다 충분히 잘하고 있었던 내가 보였다. 그래서 마치 과거의 내게 말해주듯,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내 글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때로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면, 나에게는 그것이 곧 ‘콘텐츠’이고, 그런 의미 있는 콘텐츠를 생산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기쁨이 될 거라 생각했다. 늘 고민만 하던 내가 올 가을 무렵 하나둘씩 글을 써보기 시작했다. 어떤 씨앗을 갖고서라도 가드닝을 해보는 경험만이 기르는 힘을 만들어낼 수 있다(「콘텐츠 가드닝」,152쪽)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음속 한 편에는 늘 두 가지 생각이 늘 공존했다. 하나는 ‘혹시라도 너무 꼰대스러운 게 아닌 걸까’ 하는 생각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내려놓지 않고 끝까지 써보려 노력하며 쌓아온 글이 약간은 통했던 걸까?
그래도 약간의 자격이 주어진 거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든다. 그동안의 고민과 글쓰기 노력이 헛되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배지를 원동력 삼아 글쓰기를 이어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배지의 힘인가)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의 인터뷰에 이어 책을 통해서도 내가 철학적이라고 느낀 건, 일의 태도를 떠나 인간 본연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그의 마음가짐이었다. 특히 자기다움과 이타심에 대한 이야기 중, 상대를 향한 진심으로부터 나다움이 생긴다는 말은 마치 종교적 멘트 같기도 했다(그렇다고 정말 종교적 색채가 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나 혼자 잘 되고 싶은 마음으로는 나다움이 생기지 않아요. 누군가를 도우려는 마음이 있을 때 그때 오히려 거꾸로 나다움이 생기거든요.
나다움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그의 철학은, 단순하지만 매우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런 나다움의 발견은 타인을 향한 열린 마음으로부터 나오고, 그를 위한 첫걸음은 바로 나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그러한 애정이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상대 즉, 클라이언트를 향한 시선 또한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걸 이야기하는 셈이었다. 나중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에 대해 오히려 ‘따뜻한 사람’이라고 답하는 그에게서 그의 진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 해당 분야의 현재와 그 흐름을 이해한 뒤 ‘지금 필요한 것’을 발견하고 재구성해서 더 현명한 방향을 제안하는 능력.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좋은 감각입니다. _「일의 감각」, 71쪽
현명한 방향을 제안하는 능력.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클라이언트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 그게 결국 진심 아니겠는가. 프리랜서로 일하며 클라이언트의 문제를 해결하고 길을 찾아주는 내 역할은 진심이 아니면 오래 할 수 없는 일이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본질을 알아내기 위해 끝없는 고민 끝에 발견하고 재구성해서 제안하는 디자이너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다.
상품의 가치는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역할은 ‘발견하고’, ‘끌어내서’, ‘연결하는’ 것이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잠재적 매력을 발견하고, 끌어내서, 디자인 기술로 연결한다. _「대량 생산품의 디자인론」, 47쪽
평소 클라이언트와의 이야기를 할 때, ‘대표님이 잘 되셔야 제가 잘 되죠’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오곤 한다. 클라이언트가 잘 돼야 내가 잘 된다는 말. 혹시 너무 저자세는 아닐까 하고 고민한 적도 많다. 직업적 특성상 불가피하게 을의 위치에 자주 서게 되는 상황에 놓여 위축되어 그런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으니, 결국 클라이언트에게 현명한 방향을 제안하는 능력을 지닌 디자이너의 그 마음은 타인을 향한 이타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타심이 곧 나다움을 나타낼 수 있다는 태도라는 점, 그러니 꼭 너무 저자세는 아닐까 하고 생각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롯이 책임져야 하지만 또 그만큼 자유롭기도 한 프리랜서로서의 10년. 나의 일에 있어서 다음 단계는 어디일까를 계속해서 고민하는 요즘이다. ‘다음 단계’를 위해 차근차근 하나씩 움직여보고자 마음을 먹었지만, 사실은 여전히 막막하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 만난 그의 책은, 그동안의 갖고 있었던 나의 신념들이 잘못된 것은 아님을 알려주었다.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제법 중심을 잘 잡아가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조금 더 확신을 갖고 나아가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장은 익숙한 일을 계속 이어가겠지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찾기 위한 길을 모색 중이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다져온 신념을 토대로 다양한 영역에서의 가능성을 찾아보려고 한다. 프리랜서에서 1인 회사로 넘어가기 위한 단계를 밟아나가는 중이다. 조금씩 밖으로 나와 나만의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싶다.
글쓰기 또한 배지에 힘입어 다시 수거당하지 않도록, 지금보다 더 꾸준히, 그리고 틈틈이 좀 더 구체적인 방향을 그려나가며 글쓰기 근육을 키워가고자 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새로운 일들이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
비록 현재 프리랜서로서는 여러 제약 속에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역할은, 때로는 헤매고 있는 클라이언트가 있다면 함께 길을 찾아주는 것. 그리고 때로는 클라이언트의 ‘마이크로매니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자주 생기더라도, 본질을 잃지 않는 것. 무엇보다 그 안에서 스스로 중심을 잘 지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에서 길을 열어주고 가치를 찾아주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 역할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적어도 한 단계는 이미 나아간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