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를 살피고 분석하는 편집디자인의 힘
모니터 앞이 아닌, 책상 앞에 자료와 노트를 펼쳐두고 손끝의 힘에 집중하는 시간. 새로운 작업을 위해 보내준 원고와 자료들을 살펴보고 분석해 보는 한 주를 보냈다. 디자인에 있어서 ‘완벽’이란 없듯이, 클라이언트에게서 넘어오는 자료(원고) 또한 완벽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은 디자인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디자이너라면 반드시 자료를 살피며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보충할만한 것은 없는지 잘 살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디자인’이라고 하면 그저 ‘외관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설령 4페이지짜리 아주 간단한 리플릿을 만들더라도, 페이지마다 들어갈 원고만 주면 그걸 그저 ‘보기 좋게’ 배치만 하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디자인을 하면 할수록 디자인의 초기 단계인 ‘원고를 기획하고 구성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단계라는 걸 체감하게 된다. 오래 일해도 여전히 그렇다.
디자인의 영역은 정말 디자인, 말 그대로 ‘보이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디자인의 그 어느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가구 디자이너가 가구를 단지 예쁘게만 만드는 게 아니라, 가구를 사용하는 사용자의 편의성과 실용적 측면 등 모든 것을 종합해 하나의 완성된 가구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편집디자인도 다르지 않다.
‘편집’의 사전적 정의는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 신문, 잡지, 책 따위를 만드는 일. 또는 필름이나 문서 따위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일’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일정한 방침아래’와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다. 일정한 방침이란 일관성일 것이고, 재료는 원고와 사진은 물론, 전하고자 하는 방향성과 전체를 아우르는 컨셉, 그리고 결과물의 타깃 등이 해당할 것이다. 결국 여러 가지 재료를 일정한 기준과 방향성 아래 모아서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무엇보다 분석력이 뛰어나야 하는 게 바로 ‘편집’ 분야이고, 이를 디자인 결과물까지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편집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그래서 나는 늘 원고를 분석하고, 보강하고, 흐름을 잡는 데 많은 시간을 쓴다. 그 과정이 바로 디자인의 시작이자 완성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실제 생기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 출판사에 입사해 잡지를 만들었던 때가 있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팀 내 디자이너가 혼자였던 나는 월간지의 시스템이 무척이나 버거웠다. 물론 다 그러진 않겠지만, 그리고 요즘은 다른 분위기일지도 모르지만, 월간지 특성상 취재 여부에 따라, 섭외 일정에 따라 마감에 임박해야 겨우 디자인을 진행하는 일이 허다했다.
‘마감=철야’가 당연했던 시절, 원고가 당일에야 넘어와 단 몇 시간 안에 디자인을 끝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고를 꼼꼼히 분석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신입사원인 나는 그저 쏟아지는 원고를 받아내기에 급급했지만, 돌아보면 그때부터 디자이너로서 ‘분석’의 중요성을 의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 주간 내가 살펴본 자료는 몇 해 전 처음 디자인했던 한 기관의 사업소개서였다. 시간이 흘러 다시 업데이트할 시점이 되면서 이번에 새롭게 리뉴얼하는 작업을 다시 맡게 된 것이다. 단순히 이전 작업을 다듬는 차원을 넘어, 그동안 변화한 내용과 성과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지 고민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내용이 담겼으면 좋겠다’며 그냥 나열만 해 보내온 자료를 살피고 분석하며 페이지네이션 하는 일. 건축가가 건물을 완공하기까지 탄탄한 설계를 선행하듯, 디자이너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기까지 주어진 재료를 분석하며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아 기획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기획까지 겸해야 하는 내 역할이 참 좋다. 책상 위 자료를 이리저리 살펴가며 구조를 짜는 시간이 내게는 소중하다.
결국 디자인은 ‘꾸미는 일’이 아니라, 이야기를 엮고 의미를 구조화하는 일이다. 나는 그 사실을 매번 새롭게 체감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와 내가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추구하는 디자인의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이야기를 디자인으로 잇고, 신뢰로 함께 성장해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