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디자인하는 일

by 디디

그래, 결정적으로 나는…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글 쓰는 것에 주춤하게 된 계기는 아마도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언젠가 클라이언트에게서 받았던 피드백 글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 적이 있다. 막상 통화를 하며 대화를 나눠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 유독 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기분. 어딘가 익숙한 듯 어색한 듯 보이는 그 감정은 이제는 AI를 써본 적 없는 사람을 찾기 힘든 시대가 되어버린, 요즘 들어 자주 느끼는 그런 감정이다.


“이 레퍼런스(캡처 이미지)를 참고해서 이 내용(원고)을 ppt를 만들어 줘.”


캡처 이미지 하나면 어느 정도 완성된 장표 디자인조차 뚝딱 만들어내는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아직까지도 ‘미완’의 모습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겐 그 정도쯤은 ‘지장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눈을 현혹시킬 만큼 화려함과 트렌디함 사이 기본 중의 기본을 누구보다 중요시하는 나는 앞으로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간다. 내가 생각하는 기본과 대중이 생각하는 기본이 다른 걸까?



기본기. 당연히 갖춰야 하는 자질이지만 말 그대로 기본이라서 눈에 잘 띄지는 않는 그런, 태도이자 실력. 내가 어떤 사람이자 어떤 디자이너인지를 설명하는 문장에 꼭 들어가야만 하는 단어.


조용히 혼자서만 오랜 시간 일을 하다가 회사의 이름으로 드러내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연히 낯설고 어색하다. 일감만 받고 나면 조용히 동굴로 들어가 오롯이 일에만 집중하며 살아왔던 지난 시간에 비하면, 마치 요즘은 매일이 발표자와 같은 마음이다. 뭐랄까… 긴장되는 느낌?


디디앤의 이름으로 앞으로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지를 그려보는 일 이전에, 내가 어떤 디자이너인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 생각은 자연스레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17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놓지 않고 해온 내 일을 돌아보게 한다.



신뢰. 믿고 맡긴다는 말. 사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그 말을 들을 때가 가장 좋았다. 회사를 다닐 때도 그랬고,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로 10년을 일하는 동안에도 나를 설명하기 위한 빼놓을 수 없는 단어는 ‘책임감’이었다. 프리랜서를 시작할 때 만난 클라이언트와 10년 넘게 계속 일을 한다는 것. 눈에 보이는 다른 수치화된 그 어떤 단어보다 내겐 보이지 않는 관계와 신뢰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였다.


수치화. 한동안 나를 계속해서 의문에 빠져들게 만드는 단어. 막상 회사를 만들고 보니, 눈에 보이는 수치화를 내세우는 회사들에 유독 눈길이 갔다. 나의 일을 수치화할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오. 지금까지 해온 거의 대부분의 일은 직접적인 성과와는 거리가 먼 일들이다. 기본은 물론 깊이 고민해야 하고, 단발적이기보다는 오래 붙잡고 봐야 하는 것들.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똑같다고 생각하는 일도 5년이고 10년이고 해도 질리지 않도록 하게 하는 것. 그 모든 과정과 끝. 그건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해온 일들이었다.



연결. ‘당신의 이야기를 디자인으로 잇고, 신뢰로 함께 성장합니다’라는 문장은 회사를 만들기로 하고 꽤 오랜 시간 고민하며 만든 문장이다. 잇다. 연결하다. 상대의 이야기를 내가 할 수 있는 ‘디자인’이라는 이름의 역할로 잇는(연결하는) 것. 클라이언트의 상황에 맞추어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 속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안정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연결을 통해 지속가능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


디자인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상태를 보이는 무언가의 보이는 형태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결과물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존재하며 디자이너는 포트폴리오라는 형태로 클라이언트에게 자신을 설명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그동안 내가 해온 일들을 포트폴리오의 형태로 만들고, 웹사이트에 올리며, 나를 설명한다. 하지만 앞서 내가 이야기한 기본기와 신뢰, 연결 등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웠다. 단순한 숫자로 표현하기엔 숫자는 내가 생각하는 무게에 비하면 가볍다고 느꼈다.



사람과 사람이 오가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상황이 다르듯이 그때마다 주어진 환경에 따른 역할, 해야 할 일을 통해 내가 추구하는 것은 ‘더 나은, 그리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이라는 세 글자에는 이 모든 것들이 내포되어 있다. 결코 결과물을 만들기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딥러닝을 통해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단숨에 습득하는 AI가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의 일일 것이다.


앞으로 나와 회사에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생각들을 토대로 좀 더 명확한 비전을 그리는 것. 제법 자유로웠던 프리랜서 신분에서 오는 한계를 느껴 회사를 만든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러니 계속해서 곱씹고 곱씹다 보면, 진짜 이야기를 나만의 언어로 정리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