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남편 퇴근이 늦다. 회사가 힘들고, 그래서 고군분투하느라 매일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오는 남편이 정말 너무 안쓰럽다. 점심시간 짬 내어 문자든 전화든 하던 날도 까마득해졌다. 저녁도 못 먹었다는 남편의 전화를 받고 뭐라도 간단하게 먹긴 해야겠지 싶어 고민하다가 김밥을 만들었다. 재료 여러 가지 쏙쏙 들어간 그런 김밥 아니고... 겨우 단무지와 햄 구워 넣은 초간단 김밥이다.
매번 생일날 먹고 싶은 메뉴로 김밥을 외치는 그를 위해, 집에 유일하게 상비되어 있는 스팸을 꺼내 굽고, 반찬으로 종종 먹는다고 김치 못지않게 자주 있는 단무지를 꺼내 탈탈 털었다. 밥 1인분에 소금 간, 참기름, 깨소금을 둘러 간을 본 후, 김을 꺼내고, 밥을 펼치고, 겨우 있는 재료 두 개 달랑 넣고, 조물조물 뚝-딱-. 김밥 두 줄이 나왔다.
아홉 시가 훌쩍 넘어서 맛보는, 덜렁 재료 두 개뿐인 김밥이 맛있어봐야 얼마나 맛있겠냐만은. 남편은 너무 맛있다고 했다. 하루 종일 고생했는데 겨우 이거 만들어주는 게 미안했고, 조촐한 식사 대비 맛있다고 해주는 게 뿌듯하고 고마웠다.
결혼 13년 차이지만 레시피 없이 뚝딱뚝딱 만드는 요리에는 여전히 자신 없다. 근데 김밥은, 유일하게 레시피가 필요 없는 유리 중 하나이지 않나? 재료가 꼭 갖춰지지 않아도, 있는 재료 가지고도 만들 수 있는 게 김밥이다. 당근과 우엉, 계란, 시금치, 단무지, 햄 등 오색찬란한 속재료가 있으면 물론 풍성하지만, 햄과 단무지만 있어도 김밥이 될 수 있다.
너무 멀리, 너무 빨리 나아가는 것은 스스로를 망치는 일이다. 창조성을 회복하는 과정은 마지막 1마일을 빨리 달리기 위해 10마일을 천천히 달리는 마라톤과 같다 (...) 우리는 빨리 훌륭해지고 싶지만 창조성의 회복은 그렇게 단기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_아티스트 웨이
연초부터 밀려온 알 수 없는 두려움은 나를 이것저것 시도하게 만들었다. 그중 하나는 온라인 독서 모임,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독서. 마흔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해서일까, 남편 회사의 어려움 때문일까, 막연하게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일까. 이 모든 게 복합적으로 다가와서겠지?
디자이너로서 좀 더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기도 했고, 아직 무엇인지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스스로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게 글인 걸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직까지 디자인 제품이라 할 만한 무언가는 생각나지 않으니 말이다.
수년동안 나를 가둬놓고 사람들과 차단하며 일에만 몰두하며 살다가 눈을 들어보니, 여러 세상이 보인다. 다양한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자기 PR 시대에 프리랜서로서 기가 막힌 홍보를 하며 앞으로 달려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홍보는 저렇게 하는 거구나,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분야에 있어서 방대한 아카이빙 능력으로 탁월한 인사이트를 매일같이 제시하는 사람들을 보며, 따라가고 있지 못하는 나를 보며 자연스럽게 비교를 하게 되었다. 닫힌 문을 열었더니만. 이러려고 문을 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외부에서 오는 기회에 시선이 끌리더라도
진정한 시작은 우리 내부에서 비롯된다
- 윌리엄 브리지스
겨우 속재료 두 개뿐인 김밥을 말며 생각했다. 당장 속재료를 위해 장을 보지 않아도, 당장에 장을 볼 시간이 없었어도, 가지고 있는 재료만으로 '김밥을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김밥을 만들었다. 겨우 속재료 두 개뿐인 김밥을 말며 생각했다. 재료를 전부 사고 손질할 생각에 엄두조차 나지 않아 아예 김밥 만들기를 포기해 버리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부터 해보려는 마음. 가지고 있는 것으로 우선 하나둘씩 해보는 것. 그러다 보면 조금씩 영역이 넓어질 거라는 것. 당장 나와 비교했던 그들을 따라 할 수 없음으로 포기해 버리는 게 아니라, 있는 것으로 우선 시도해 보는 것. 재료는 부족해도 일단 김밥을 만들듯이 말이다.
많이 써보면 되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글도 마찬가지다. 당장 작가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도전하기엔 벽이 너무나 놓고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해 보여 쉽게 포기하게 되는데, 그런 마음은 거창하기'만' 할 뿐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매일매일 꾸준히'라는 타이틀로 정말 단 세 줄이라도 써내려 가다 보면, 때로는 그 세줄이 모여 하나의 글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때의 감각 훈련으로 글 한편을 한 번에 뚝딱 써 내려갈 수도 있게 될 날이 올 거라는 믿음, 그리고 행동. 그 행동으로 오늘 아침 모닝페이지를 쓰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분명 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새로운 작업을 앞두고 파일을 정리하다가 문득, 그동안 기가 막힌 자기 홍보는 하고 있지 못했지만 여전히 계속해서 일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에 나를 향한 뿌듯함을 느낀다. 아, 그래도 나 제법 잘하고 있구나. 남들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것 또한 나만의 방식이었겠구나.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구나. 가고 있구나. 알아차린다.
아무튼,
그래서 오늘 점심은 김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