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여도 괜찮아!
주말 저녁 우연히 뉴스에서 배우 지진희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이름답게(?) 진지한 대화가 오가며 25년 차 배우로서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화가 오갔는데, 인터뷰가 마무리될 때 즈음, 그에 말에 시선이 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자 외압이든 어떤 거에 흔들리지 말자
큰 걸음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작은 걸음이라도 내가 걸을 수 있는 만큼만 보폭을 넓히자
그리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자
한 걸음 한 걸음 내가 디딜 수 있는 거리만큼 앞으로도 쭉 걸어갈 겁니다.
그것은 누구의 삶도 아닌, 제 삶입니다
https://youtu.be/QfhZR-ybl6U?feature=shared
부끄럽지만 2019년에 처음으로 책이란 걸 만들게 되었다. 그때 '출간'이라는 걸 처음 해보고 나서 나에게는 '너무 부끄럽다!'와 '다음엔 좀 더 잘해봐야지'이 두 생각이 교차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내 본업인 디자인과 관련한 이야기를 담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연결되었고 그해부터 틈틈이 브런치에 글을 올려보기 시작했다. 브런치북도 도전해 봤고, 당당히 탈락했다. 2020년, 코로나 이후 이상하게 일이 많이 몰리면서 나는 또다시 자연스럽게 글쓰기와 멀어졌고, 그렇게 내 브런치는 한동안 오래 멈추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종종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지만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넓디넓은 하-얀 화면에 회색빛 글자가 한두 자씩 타이핑되기를 몇 번, 이내 곧 멈춰버린 글은 '작가의 서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언제 썼는지도 모를,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쓰다 만 글'이 가득 쌓였다. 그러다가 올해 초 인생 처음으로 독서 모임을 하게 되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오래 멈춰있던 '글쓰기'에 대한 욕구가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래도록 방치되어 먼지가 가득 쌓인 이 공간에 먼지를 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생각으로만 멈췄던 걸 실행하자고 마음먹었고, 나는 8월 한 달간 3편의 글을 썼다! ‘겨우 3편 밖에’가 아니라, 나에겐 ‘3편이나’ 되는 일!
그중 며칠 전 몇 시간 만에 휘리릭 쓰게 된 글이 우연히 인기글 같은 리스트에 걸렸는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누적 조회수가 10,000명을 넘게 되었다. 사실 '이 글이 이렇게 인기글에 걸린다고...?' 싶은 글이었는데 이유인즉슨, 무언가 '써보고 싶은 글'을 위해 나름대로 고심해서 쓴 글(그래봐야 아까 말했던 3편 중 2편이다)보다 몇 시간 만에 한 자리에서 휘리릭 쓴 그 글이 인기글에 실렸기 때문이었다.
생각해서 쓴 티가 많이 났던 걸까?
내가 쓰고 싶은 글은 디자인 관련 글이었는데
디자인 이야기라 너무 재미없어서 그랬나?
너무 개인적 경험이라 와닿지 않는 걸까?
단편적인 거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글자수도 생각해 가며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완성한 글이 내심 많이 읽히길 원했는데 온라인에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서 10년의 경험치를 글로 쓰다 보면 누군가에겐 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그러려면 기획이 더 필요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저런 고민거리를 이야기하자 남편은 ‘너무 생각하지 말라’며, 그냥 계속해보라고 했다.
독서 모임에서도,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읽고 있는 모든 책을 통해서도, 마지막으로 심지어 지금 작업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도 한결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메시지는 ‘꾸준함’이었다. 꾸준함은 완벽함보다 먼저 수행해야 하는 행동인데, 우습게도 한동안 나는 자꾸만 ‘완벽함’을 내세우며 꾸준함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남들 눈에는 티도 안 날지언정 작은 걸음이라도 아주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걸 인지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강제적으로 책을 읽어야만 하는 상황에 나를 던져두며(독서 모임) 책 읽는 습관을 서서히 들였다.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데는 평균 66일이 걸린다는 문장의 힘을 믿으며 하루에 책 30쪽씩 읽기, 혹은 짧은 한 챕터씩 읽기를 반복해 나갔다. 디자이너들이 가장 어려워한다는, ’포트폴리오 만들기‘도 같은 맥락으로 하루에 작업 하나씩 정리해 홈페이지에 올리기 미션을 스스로에게 주었다. 하나씩 차근차근해나갔더니, ‘제대로 정리해서 완성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완벽함을 추구하느라 4년 내내 방치되었던 홈페이지가 이제는 제법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글쓰기도 마찬가지겠지?
‘작은 걸음으로 꾸준히 앞으로’. 찰나의 순간에 감정이 휘둘릴 때마다 이 말을 새겨야겠다. 찰나의 조회수에 휘둘리지 말고, 거창하고 완벽한 ‘완성작‘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다 아예 손 놓아버리지 말고. 꾸준히. 늘 이야기하지만, 개미 걸음이라도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보자. 오늘도 이렇게 한 걸음 내디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