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스타트업과 홍보물 2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기존 회사에서는 제작팀, 편집팀, 디자인팀이 세분화되어있어서
원고와 제작 발주는 다른 팀에 맡기면 되는 구조였다. 그런 구조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새로운 시련이 닥쳤다. 그것은 바로 견적 비교 후 발주!
스타트업은 한정된 예산에서 쓸 곳이 많은데 예산은 절약하면서도 퀄리티는 높여야 하는 괴리가 생긴다.
예산이 얼마 책정되어있는지를 알기에 가공 욕심을 많이 부릴 수도 없는 현실이다.
원고 정리와 디자인이 끝나 다 털었다 싶었더니 이번엔 발주 문제가 남았다.
나에겐 가장 취약한 부분이 견적 비교인데.. 그걸 내 손으로 직접 하려니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우선 인쇄소를 검색했더니 네이버에 검색 결과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중 싼 금액으로 인쇄를 찍는 나름 디자인 업계에서 이름 있는 인쇄소 사이트를 들어가 보았다.
합판 인쇄를 주로 하는 곳인데 품질이 너무 떨어져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진 않지만 가격은 싸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 한 군데는 독판 인쇄를 하는 곳인데 색상도 내가 원하는 데로 정확히 맞춰주고 납기일도
잘 맞춰주는 기존 거래처 인쇄소에 연락해 각각 견적을 받아보았다.
견적을 받아봤는데 합판과 독판의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가격차이가 조금 났다.
내가 봐도 싼 데를 더 선호할 것만 같았다.
IT기반 벤처에서는 인쇄와는 거리가 좀 있다. 그러기에 설명을 해도 피부에 잘 와 닿지가 않는 게 사실이다.
이럴 때는 경력직의 설명과 설득이 들어간다.
‘인쇄에는 합판 인쇄와 독판 인쇄가 있는데 각기 장단점이 다르다.
합판 인쇄는 다른 업체의 인쇄물과 내 것을 같이 몰아서 찍기 때문에 품질이 복불복이다.
또한 종이의 선택이 제한적이다. 대신 가격은 내려간다. 일종의 공동구매 형식이라 보면 된다.
반면 독판 인쇄는 내 인쇄물만 담당으로 찍기 때문에 컬러나 품질이 뛰어나며 종이나 후가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대신에 가격이 올라간다’라고.. 해도 싼데서 해요..라고 했다가 결과물이 허접하게 나오면
왜 인쇄가 이렇게 나왔냐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지 않고 결과물의 좋은 품질을 얻기 위해서는 설득의 과정은 필수다.
두 개의 견적 막중한 책임감
견적서를 받았을 때 두 개의 가격이 똑같다면 편한데서 하면 된다. 그러나 두 개의 가격이 차이가 난다면 그때
부터 문제는 발생한다. 싼 곳을 하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지만 싼 견적을 두고 비싼데서 발주를 하겠다 하면
그때부턴 기나긴 시간이 걸린다. 왜 이곳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제작물이 외부용인지 내부에서 막 쓰는 용도인지에 따라 나의 결정도 달라진다. 상황을 보고 어떤 용도인지 목적을 파악하고 나서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만큼 스타트업에서의 경력직이란 꼬리표는 막중한 책임을 동반한다.
인쇄물만 전문적으로 해오던 나에게는 이런 방식 차이를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가격이 올라가더라도
독판 인쇄를 더 선호한다. 퀄리티도 좋고, 1:1 대응이기 때문에 요구사항을 반영하기도 편하다.
급하게 맡겨도 납기일도 다 맞춰주고 오랜 거래를 했다면 가끔은 가격 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비싼 독판 인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디자이너는 좋은 품질과 한정된 예산안에서 신중히 잘 선택을 해야 한다. 필요한 이유를 말할 줄 아는 디자이너가 돼야 된다.
스타트업에서는 혼자가 부서의 대변인이기 때문에 막중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특히 경력직은 그 책임의 무게가 더 하다. 사소한 선택 하나가 회사의 방향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나 하나쯤이야가 팽배했다면 이제는 나하나로 많은 게 달라진다.
그래서 경력직들이 스타트업에 들어왔을 때 초반 적응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기존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기존에 익숙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상치 못한 것을 받아들일 줄 알고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하며 부딪혀보고 뛰어다녀보아야 한다.
그만큼 스타트업에 대한 막연한 환상으로 입사는 금물이다. 현실은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시작이라는 것만 다를 뿐, 기존 회사보다 더한 책임과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스타트업 디자이너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만들기 시간
우여곡절 끝에 인쇄를 넘기고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을 때 한 가지가 단어가 머릿속을 휙 하고 지나갔다.
그것은 바로 ‘핸드폰 모형’와.. 정말 이 길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10개 정도의 모형이 필요했는데 업체에 맡기기에는 택도 없는 수량이었다. 그래서 자체 제작을 결심하였다.
회사 근처 문구를 찾아가 프린터기에 들어가는 두꺼운 종이를 한 묶음 구매했다.
그리고 OHP 필름도 함께 구매했다. 핸드폰 화면을 필름으로 대체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무실 한가운데의 회의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곤 핸드폰 모형을 프린트한 것을 잘라 샘플 하나를 만들어 보았다.
인쇄물이 도착을 안 했기에 가제본을 뜬 브로슈어를 껴보았는데 맙소사!! ‘안. 맛. 다’
또다시 프린트를 하여 샘플을 만들어 보았다. 맙소사!! ‘너무 뻑. 뻑. 하. 다’
그렇게 몇 번의 실패를 했는지 모른다.
계속 프린트, 재단, 접착, 껴보고, 실패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내가 바보인가? 하는 자괴감까지..
결국 가까운 문구로 가 재료를 다시 구매했다. 이번에는 성공하리… 눈에 쌍심지를 켜고 샘플을 제작했는데
휴.. 이제야.. 성공.. 그렇게 핸드폰 모형 샘플 만드는데 1일 10개의 모형 만드는데 1일 총 2일의 시간이 걸렸다. 뭐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대학 졸업하고 처음 해봐서 그렇다!
실무에선 해볼 일이 없었으니 어설플 수밖에….
산고 속의 결과물
나의 브로슈어를 들고 행사장을 참여한 직원들의 좋은 평가가 이어졌다.
보통 사람들이 앱 설명해달라고 하면 핸드폰을 켜고 앱을 켜고, 설명하다가 문자나 전화 와서 흐름이 끊기는데,
저렇게 핸드폰 모형으로 오프라인 상에서 보여주니 속도도 빠르고 설명하기도 편리했다고 한다.
뿌듯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프로도 아닌 아마추어도 아닌 어설픈 입장에 놓인 편집디자이너의 스타트업 브랜드 입성기.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 책임지고 해야 해서 부담감도 막중하고 중간에 삽질도 하지만,
그래도 결과물이 나오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스타트업 디자이너의 장점은 무어라 묻는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만들기 때문에 결과물에 대한 애착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되기 때문에 더 많은 리서치와 생각을 할 수가
있다.
빨리빨리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천천히는 너무나 상극이라 초반에는 분위기 적응이 안되어 많은 삽질도 하고… 난 왜 여기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을 뒤집으며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내 손에서 결과물이 탄생되었을 때의 그 희열 때문이다.
나의 콘셉트가, 나의 생각이, 브랜드라는 이름으로 회사의 대표 이미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축복이 아닌가? 난 나의 선택에 만족하며 다양하고 재밌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즐겁다.
첫 삽질이 끝났으니… 이제 두 번째 삽을 푸러 가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