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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정 May 31. 2021

철학은 디자이너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사수없이 일하는 주니어가 바라본 성장

사수 없는 1년 차 주니어 디자이너

설립 2년 차인 스타트업에 입사한지 갓 1년이 지난 주니어 UX/UI 디자이너. 나를 나타내는 객관적인 수식어이다. 현재 회사는 스타트업 특유의 자유로운 업무환경이 조성되어 있고, 칼퇴, 적은 업무시간, 만족스러운 연봉, 가까운 거리 등 장점이 많다. 하지만 무릇 사람이 모든 것에 만족할 수는 없는 법. 인력이 적은 스타트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아래의 세 가지에 공감할 것이다.


1. 스타트업 직장인은 홀로 일당백 역할을 해내야 하며 그만큼 책임의 무게가 크다.

2. 스타트업 직장인은 주 업무 외에도 부수적인 업무를 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3. 스타트업 직장인은 불확실하고 체계적이지 못한 업무 시스템에 물경력이 걱정된다.


입사하자마자 머릿속에는 위와 같은 걱정과 고민으로만 가득했다. 그러다 집에 먼지가 쌓인 채로 방치된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어보았다. 책의 제목처럼 철학은 디자이너의 삶에도 무기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흥미가 생겼고 결론적으로는 사수가 없어도 괜찮다는 생각과 성장을 대하는 긍정적인 태도를 얻을 수 있었다.





사수가 없다는 불확실함이 가져다주는 긍정적 효과

스키너의 실험에 따르면 인간은 행위로 인한 대가가 반드시 주어질 때보다 대가가 불확실하게 주어질 때 더욱 효과적으로 강화된다고 했다. 즉 인간의 본성은 불확실성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 사수 없는 주니어에게 1년간의 업무 생활이 바람직했는지, 성장은 이루어졌는지 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확실한 대가에 어떻게 성장해 가야 할지 답답하기만 한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과 초조함은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될 것만 같아 지식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게는 ‘온라인’이라는 똑똑한 사수가 있었다. 부족한 부분은 구글링과 강의를 들으며 보완하고, 해결이 그 선에서 끝나지 않으면 디자이너 커뮤니티를 통해 경력자 선배에게 답을 구했다. 그리고 집에서도 세미나, 컨퍼런스, 뉴스레터 등을 볼 수 있어 굳이 밖을 나가지 않아도 넘실거리는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요새는 코딩, 데이터에 관심이 있어 강의를 들으며 여러 스킬을 늘리고자 한다.


그렇게 나는 사수가 없다는 불확실함 덕분에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지금의 부지런한 움직임은 나를 멋진 디자이너로 성장시킬 튼튼한 발판이 되어줄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사수 없는 자, '자유'라는 형벌을 받아라

Q. 혹시 직업과 직급이 어떻게 되시나요?
A. 제 직업은 서비스 기획자이자 UX 라이터이자 UX/UI 디자이너이고요. 직급은 대리이자 과장이자 팀장입니다.


사르트르는 ‘자유’를 매우 무거운 짐으로 비유하며 ‘인간은 자유의 형벌에 처해있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모든 디자인 업무 의사결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로 끝난다. 혼자 여러 개의 직업과 직급을 가지고 있으니 결재와 보고를 할 필요 없이 자유롭다. 게다가 회사는 지원을 아끼지 않아 더욱 자유로운 생각을 펼칠 수 있다.

 

‘자, 그럼 흰 캔버스와 연필을 쥐여줬으니 뭐라도 그려보렴.’ 당신은 흰 캔버스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초짜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부풀어져 거대해진 자유는 내가 짊어지게 될 책임의 무게와 비례한다. 작년에 갓 입사했을 당시, 앱 네비게이션 바의 좌우 스크롤에 관해 제대로 된 조사도 마치지 않은 채 몇 개의 레퍼런스만 보고 수정이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다가 후에 의견을 번복한 경험이 있다. 결국 성급하고 제대로 되지 못한 판단으로 인해 개발자분께 혼선을 주었다. 이 사건을 겪고 나서 자유로운 만큼 뱉는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분명 앱의 방향성에 맞는 이상적인 디자인 방법론을 누군가의 제제 없이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은 나 홀로 디자이너의 큰 장점이다. 그럼에도 자유라는 형벌에 대한  책임의 무게가 크기 때문에 중간중간 업무가  잘못되어가고 있지 않나 체크해야 하는 것은 필수이다.





성장덕질 하는 성장덕후입니다

'UX/UI 디자이너 배유정. 이게 맞는지 틀렸는지 도통 모르겠어 답답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다.' 사수 없이 일을 하고 있으니 의지할 곳이 없어 성장을 덕질하는 ‘성장덕후’가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이 업무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정의부터 다시 온라인으로 쳐본다. 그리고 내 결정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닌지 확인하고 확인한다.


혹자는 그럴 수 있다. 스타트업에 다니는 디자이너는 너무 다양한 일을 하는 제너럴리스트라 모름지기 스페셜리스트가 되려면 여러 바운더리보다는 한곳만 파는 게 더 좋지 않아? 전반적 영역을 다 건드는 사람보단 차라리 그 시간에 전문적으로 파는 사람이 능력이 더 출중하고 좋을걸?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현재가 아닌 먼 미래를 보고 싶었다. 아무리 능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전반적인 능력을 어우르고 크게 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사회 초년생 때 이 모든 과정을 실무로 겪어 보았으니 나중에 리더의 자리에 있을 때 각 팀원들의 고충과 능력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빨리 능력을 발견해서 개개인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일의 효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세운 목표가 있다. 2~3년 정도는 넓은 영역의 기획/디자인을 하다가 석사를 가서 하나를 깊게 파자! 그것이 나의 스페셜리티를 높여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페셜리스트지만 제너럴리스트로서의 면모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사수가 없다고 걱정하지 말자.

나는 그리고 우리는 사수가 없어도 깊게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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